2015년 6월 25일 목요일

공공미술의 종언

한 때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여겨졌던 ‘공공성'과 ‘공공미술’이라는 미술 용어를 요즘 진보적인 미술 담론 안에서 들어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오늘날, 공공미술은 지나간 유행에 불과하다. 한 때 집단적으로 부과됐던 ‘공공성’에 관한 낭만주의적 환상이 불러일으킨 결과가—어쩌면 두 번째 새마을운동이라고 해도 무방할—미학적 건설주의의 폐허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규모의 공공미술 예산이 해마다 마련되고 있으며, 전국 각양각색의 예술가들이 모이고 있으며, 그 결과 공공미술 사업은 여전히 마치 유령처럼 예술계와 지자체 사이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여기에 관계된 예술가 중 어떤 누구도 공공미술에서 예술의 미래를 점치는 사람은 없다. 한편, 어떤 이들은 다른 종류의 미래를 공공미술에서 본다—예를 들어 정치의 미래, 복지의 미래, 행정의 미래. 따라서 오늘날 공공미술에는 어떤 냉소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행정의 권위에 도전한 “행정의 미학”에 대한, 행정의 위대한 복수, 즉 (말하자면 권미원이 지적한) “미학의 행정”에 대한 미술가들의 패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1]

“공공미술”은 왜 실패했을까?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엄밀한 공공성 개념의 부재를 문제점으로 지적해왔다. 하지만 그런 반성은 반쯤은 짓궂은 농담처럼 들린다. 미술이 이데올로기를 부연 설명하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기도 한 이상, 공공미술이 지금까지 생산되어왔다는 것은 곧 공공성에 대한 입장을 끊임없이 표명해왔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미술을 둘러싼 담론은 여전히 ‘공공성’ 개념에 대한 어떤 갈증으로 허덕이고 있다. 즉, 여전히 공공성 개념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미술이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아르코에서 2008년에 출간된 <공공성>이라는 선집이 그러한데, 철학, 행정학, 법학, 미학 등에서 규정하는 공공성의 의미를 제각각 규정하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시도다. 결론은? 합의될 수 없는 다양한 개념의 층위를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공공미술/공공성 개념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기 전에 최소한, 오늘날 한국에서, 공공미술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냉정하게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공공미술을 잘 모르고 시작했지만, “공공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종언 만큼은 최소한 확실하게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이쯤에서 내가 공공미술이라고 부르는 미술의 형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데, 권미원이 잘 정리했듯이, 첫째, 공공장소에 설치한 모더니즘 조각, 둘째, 건축-환경과 공모하는 공공디자인, 그리고 셋째, (뉴장르-공공미술과 그 지평으로 읽힐 수 있는) 행동주의 공공미술이다. 첫째의 경우, 소수자에게만 허락됐던 웰-메이드 예술의 향수적 측면을 대중 차원으로 확대시킨다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둘째의 경우, 첫째가 문화 소외자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서, 기능주의 미술로 전환하면서 이뤄졌다. 셋째의 경우, 문화 소외자의 참여 자체를 미술의 핵심으로 내세우며 그 전의 실패를 만회하려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미국의 공공미술 지원 제도의 변천사를 선형적으로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한국에서는 공공미술의 발전사로 오인되고 있다. 특히 마지막의 행동주의 미술은 (폐허를 비교적 적게 남긴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에서 가장 진일보한 공공미술의 버전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커뮤니티아트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행동주의 공공미술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과정을 작업의 몸통 삼아, 타자를 예술에 참여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꽤 낭만주의적인 투사로 보이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문제점을 주로 지적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예술가의 자리’에 관한 문제다. 이 문제는 발터 벤야민의 글 <생산자로서의 작가>에서 유사하게 지적된 적이 있다. 벤야민은 이 글에서 많은 부분을 “정신적 엘리트”로서의 좌파 부르주아 지식인-예술가를 비판하는 데 할애한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런 예술가는 “올바른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혁명적 노동자와 연대해서 부르주아 문화의 생산수단을 변혁시키는 것에 관심이 없다. 즉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혁명적 주체를 인정하지만, 현실의 계급투쟁이나 사회혁명에 진실로 냉소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벤야민에 의하면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옆에서’ 자신의 설 자리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2] 그러나 그것은 도대체 무슨 자리인가?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후원자의 자리, 즉 벤야민식으로 말하자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자리”다.”[3]

이데올로기적인 후원자가 종국에 실패하는 이유는, 그 자리가 확고하면 할 수록 노동자가 소외될 뿐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재현을 통해서 그 간극을 확실하게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4] 이것이 할 포스터가 “민족지학자로서의 미술가"에서 지적하는 바로, 오늘날 타자를 진리의 장소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가진 미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다. 예컨대 많은 커뮤니티아트는 사라져가는 지역 공동체의 문화를 상징계에 복귀시킴으로써 지배적인 문화를 비판하려 한다. 하지만 이렇게 미술에서 소환시킨 지역적 타자는 진정한 타자라기보다, 어쩌면 예술가-지식인 (혹은 그보다 상위의 주체가) 스스로를 타자에 투사한 결과, 오히려 ‘안전하게’ 재현된—말하자면 포르노그라피에 가까운—타자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은 “타자를 ‘자기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낡은 방식, 즉 타자를 여전히 자아를 돋보이게 하는 금박 장식쯤으로 남겨두는 (그 과정에서 이 자아가 아무리 곤란을 겪는다 해도) 방식으로 자아를 ‘타자화’할 것이다.”[5] 그 결과 지배적인 문화의 안티테제로서 ‘외부의 공포’로 남았어야 할 타자의 문화는, 박물관 유리에 잘 포장되어 질서정연하게 디스플레이 될는지도 모른다.

벤야민이 지적했던 이데올로기적 후원자가 생략한 생산수단의 변혁의 문제는 다음의 문제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자본의 문제다. 공공미술가가 그들의 작업에서 자본의 존재를 괄호치려는 경향이 있지만, 대부분의 공공미술은, 심지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프로젝트에 불과하더라도, 문예진흥기금과 같은 국가 규모의 지원금 없이는 실현/유지되기 힘들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텐데, 타자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후원하는 자가 공공미술가라면, 그 공공미술가를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정부와 지자체다. 그리고 이때 지원금은 보통 정치적/행정적 대의, 즉 “소외지역 생활환경 개선”과 같은 목적 하에 출연된다. (공공미술 추진위원회의 <아트인시티>,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안양시의 <APAP> 등을 떠올려 보라.) 따라서 지원금을 통해 추진되는 공공미술 ‘사업’에는 근본적인 차원의 어떤 정치경제학적 개입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정치경제학적 개입에 대해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김장언의 글 <상징과 소통, 공공미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에서 아주 상세히 잘 설명하고 있다. 김장언은 이 글에서 2000년대 중반 미술계의 핵심 키워드였던 공공미술이 사실은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한국사회 속에서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호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시장본위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근대적 국민-국가의 역할은 최소한으로 축소되는데, 이는 곧 사회적 갈등 요소를 통합해 줄 국가 차원의 사회적 안전장치—즉 공공성—가 모두 해제됨을 뜻한다. 이때, 신자유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국민국가는 어떻게 사회재통합을 기획할 것인가? 김장언은 “협치(governence)와 문화”라고 주장한다.[6]

공공미술은 이런 상황에서 호명된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다소 유연하게 작동하는 사회통합 장치로서 말이다. 이때 공공미술은 새롭게 고안된 복지모델이자,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생겨난 다양한 사회 경제적 문제를 상상적으로 해결하는 문화(산업) 모델이기도 하다. 공공미술이 전개되자, 전국의 달동네가 예술마을-기업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가? 공공미술의 근본적인 문제가 신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된다면, 우리는 분명히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공공미술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하의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의 예를 보자.

한때 동피랑 벽화마을은 공공미술의 모범 사례로 자랑스럽게 손꼽혔던 곳이다. 철거위기에 놓였던 달동네 동피랑 마을은, 대규모의 벽화작업을 통해 ‘벽화마을'로 거듭났으며, 덕분에 관광객이 몰려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동피랑 마을은 2013년 3월 생활협동조합 '동피랑 사람들'을 설립한 데 이어 마을기업으로 지정받았다.) 하지만 이 “한국의 몽마르뜨”가 ‘경쟁력’을 갖춰야 할 운명에 처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후 예술마을이 전국 규모로 난립하자 더이상 동피랑은 매력적인 관광지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업화한 마을은 벽화 비엔날레와 같은 규모의 행사를 기획/조성하여 장소마케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한편 그와 동시에 증가한 관광 수요는 동피랑을 더이상 주민의 생활 터전으로 남아있을 수 없도록 했다. 한 보도에 의하면 올해 초 벌써 5가구가 이사를 갔으며, 외지인 1명이 이 집을 모두 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 가운데 1곳은 커피숍으로 바뀌어 동피랑 사람들이 운영하는 점포보다 수입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7] 이런 현상을 일각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도심부촌화)이라고 부른다.

긴 예를 통해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어느 정도 드러난 것 같다. 동피랑 벽화마을의 문화전략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봉합하기 위한 정책적 전술전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달동네를 부촌화시킴에 따라 소외자를 양산시켰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선봉장 역할을 동시에 맡았다. 동피랑의 예에서 문화를 통한 지역 재생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동피랑의 공공미술이 간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동피랑의 문화적 부흥운동은 어쩌면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을 문화에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내가 보기에 동피랑의 문제는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공공미술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심지어 예술가가 지자체의 요구에 반할 경우에조차 그렇다. 많은 “진보적인” 공공미술가는 지자체와 행정가의 문화적 무지를 비난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창조해 놓은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지에 관해서는 행정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혹은 더욱 철저하게 위악적으로 이들과 공모한다. 공공미술가의 아킬레스건은 자본이다. 공공미술은 전지구적 자본에 함구할 때만 작동할 수 있는 문화논리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내가 보기에 공공적이지도, 미술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제도적이고, 행정적이다.) 하지만 공공미술은 여전히 정부와 지자체의 통합수단으로 막대한 규모의 예산이 투여되고 있고, 소외지역에는 유지관리 조차 되지 않은 볼품 없는 문화적 폐허가 즐비하게 양산되고 있다. 우리에게 여전히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되물어볼 수 있는 여유가 남아 있을까? 만약 그럴 여력이 있다면, 공공미술의 실패를 인정하고, 그것에 제동을 거는 일에 온 힘을 쏟는 것은 어떠한가? 온 국토를 헤집고 다니고 있는 이 좀비들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하기 보다는, 시름시름 앓고 있는 미술의 상황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어떤가? 14.12.09

* 산업예비군 도록에 기고됐음.
(짧은 보충은 여기로: http://be-writing.blogspot.kr/2015/11/blog-post_22.html)
________________

[1]권미원, 『장소특정적 미술』, 김인규 외 2인 역, 현실문화사, 2013년, 81쪽.

[2]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반성완 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5년, 261쪽.

[3] 발터 벤야민, 위의 책, 같은 쪽.

[4] 할 포스터, 「민족지학자로서의 미술가」,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출판부, 2010년, 274쪽

[5] 할 포스터, 위의 책, 279쪽

[6] 김장언, 「상징과 소통 : 지금 한국에서 공공미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Visual』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 2010년 7호, 90쪽.

[7]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의 위기」, 『연합뉴스』, 2014년 4월 14일 17시 48분,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4/04/14/0907000000AKR20140414161600052.HTML (검색일: 2014년 12월 9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