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일 목요일

예술과 디자인

얼마 전 ≪서울, 25부작≫의 홈페이지와 관련해 SNS상에서 자그마한 논란이 있었다. 시작은 최황이라는 이름의 작가로, ≪서울, 25부작≫의 웹사이트가 자신이 기획하고 작가로 참여한 ≪광장조각내기≫와 “아이디어와 보여주는 형식”이 몹시 유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1] ≪서울, 25부작≫의 웹사이트는 미술계 일을 꽤 많이 맡아서 하는 것으로 알려진 디자인 스튜디오인 일상의실천이 만든 것으로, 공교롭게 일상의실천은 ≪광장조각내기≫ 웹사이트의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일단, 최황은 일상의실천이 아니라 ≪서울, 25부작≫의 실무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아마 ≪광장조각내기≫의 웹사이트의 제작자가 일상의실천으로 동일하므로 표절까지 가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테다.[2] 그러다 약 4시간 뒤 최황은 생각을 바꾼다. 자신의 SNS 계정에서 최황은 ≪서울, 25부작≫이 웹사이트뿐만 아니라 전시의 주제나 형식까지 모두 유사하다고 판단하여, “창피한 줄 압시다”라는 문장을 필두로 본격적인 비판을 시작한다.[3]

여기서 최황은 일상의실천을 향해 큰 실망감을 표하며 “문법의 문제가 아니라 문체의 문제”를 문제 삼았다.[4] 문법과 문체는 뭐가 다를까? 이걸 이해하기 위해 『글쓰기의 영도』씩이나 들고 올 필요는 없겠지만 대략 문법은 일반적이고 문체는 독특하다고 이해하면 여기선 무리가 없을 듯하다. 왜 이런 구별을 했는지는 비교적 분명한데, 최황은 일단은, 일상의실천을 자신의 ≪광장조각내기≫에 디자이너이자 작가로 섭외했기 때문이다.[5] (그리고 이것이 일차적으로 최황이 비판의 대상으로 일상의실천이 아니라 ≪서울, 25부작≫의 실무진을 떠올린 이유인 듯 보인다.) 최황 입장에서, 일상의실천은 비슷한 개념의 전시에 비슷한 작품을 다른 듯이 내는 아방하지 않은 작가로 비쳤을지도 모르며, 약간의 심한 배신감과 함께 매머드급의 ≪서울, 25부작≫ 프로젝트가 일상의실천이 디자인한 홈페이지를 통해 유명세를 탈 경우, ≪광장조각내기≫의 의미가 역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퇴색될 수 있으리라 걱정이 미치는 것도 자연스러운 전개다. 두 작품의 전체적인 개념과 형식이 유사하다고 비쳐질 때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가가 가지는 고민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하다. 더군다나 ≪광장조각내기≫가 안티-공공미술이라면 최황이 보기에 ≪서울, 25부작≫은 ≪광장조각내기≫를 정반대로 차용한, ≪광장조각내기≫가 비판하고자 했던, 누가 봐도 “관-제도”의 공공미술이다. 만약 일상의실천을 작가의 위치에 놓을 수 있다면, 이는 실로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데, 똑같은 작업물로 하나는 안티-공공미술에, 다른 하나는 정반대의 관-제도 공공미술에 참여한 것이다. 최황이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여기쯤인 듯하다.

일상의실천이 내놓은 답변은 조금 다르다. “최황 작가가 찾아온 것은 작년 8월이었다”로 운치 있게 시작하는 이 글은 곧바로 ‘손님 이제 와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흐름으로 간다.[6] 그에 따르면, ≪광장조각내기≫의 웹사이트 작업은 원래 2017년 ≪타이포잔치≫에 출품했던 골격을 그대로 사용한 작업이며, 터무니없이 적은 보수로 열정페이를 강요하고 시간도 별로 주어지지 않았지만 의미가 있어 보여서 특별히 자신의 ‘문체’를 “차용할 수 있게 허락해줬다.” 마지막의 표현의 이 복잡 미묘한 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간에 일상의실천은 이 논란에서 최황이 애매하게 부과한 ‘작가’라는 타이틀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대신, 일상의실천은 예술가의 생각을 충실히 구현해주고 싶은 선의의 마음을 가진 디자인 에이전시로 돌아간다—여기서 최황은 당연히 클라이언트가 된다. 디자인은 매우 “섬세한 노동”이며, 3개의 프로젝트는 큰 골격은 공유하고 있지만 “레이아웃, 타이포그래피, 인터페이스, 개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른 접근과 고민으로 만들어진 결과물들이다”라는 것—이것은 모두 기술적인 문제다.

여기에 더해, 이어지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 최황은 기획자와 작가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일상의실천을 작가로서 섭외할 때 최황은 기획자이지만, 이제는 자신이 기획자가 아니라 작가라 기획의 일반적인 진행을 잘 알지 못하며, ≪광장조각내기≫ 역시 그 자체로 자신의 작업과 다름이 없다고 밝힌다.[7] 이 발언은 물론 자신의 진심을 표출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부지불식 기획자와 다른 참여 작가 사이의 암묵적 거리를 좁히는 효과도 있다. 이것은 창조적인 큐레이터가 작가의 작업을 도판으로 만들어버린다거나 하는 전시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로 사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위해 고용한 어시스턴트의 창의력까지 도용하는 일에 비견될 만하며, 최황이 전시가 작업이었다고 공표하는 순간 이 갈등은 심화된다. 이렇게 최황은 기획자와 작가 클라이언트 사이에서, 또 일상의실천은 참여작가와 디자인 에이전시 사이에서 몹시 진동한다.

가장 바깥의 표층

두 프로젝트에 관한 논란을 지켜보다 보면 한 가지 의구심이 든다. 유사하든지 다르든지 간에, 양측의 말에서는 전혀 구체적인 참여작이 등장하지 않으며, 마치 웹사이트가 전체 프로젝트를 대변하는 듯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웹사이트를 보면, ≪광장조각내기≫의 경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서울의 지도 위에 표시된 작업의 좌표인데, 여기를 클릭하면 간단한 작업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일단은 이것이 가장 먼저 ≪서울, 25부작≫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튼 상당히 깔끔한 레이아웃에 다양한 필자의 텍스트와 작가의 이력, 작업 아카이브가 올라와 있어서 전시 카탈로그를 대체해도 될 정도로 포멀한 인상이다. 그럼에도 부분적인 작가의 스테이트먼트와 스틸컷, 영상만으로는 대략의 스케치는 가능해도 작업의 전모를 구체적으로 파고 들기는 힘들다—그러니까 레이아웃이 깔끔하게 잘 빠졌을 뿐, 일반적인 카탈로그의 수준 이상의 정보는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 25부작≫의 경우는 어떨까? 먼저 ‘스토리’ 페이지에는 서문 격의 인사말과 참여작가의 한마디가 짧게 올라와 있어서 ≪광장조각내기≫의 ‘광장’과 대응한다. ‘스페이스’ 페이지에서 보여주는 지도의 경우, 라운드가 직각이 되어 있다거나 하는 것만 빼놓곤 ≪광장조각내기≫와 같은 시스템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며, 마찬가지로 클릭하면 간단한 작업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외 ‘시퀀스’와 ‘스토리지’ 페이지에는 각각 진행과정과 보도내용 등을 기록해놨는데, 큰 틀에서 둘을 비교하면 이렇다. ≪광장조각내기≫의 경우, 좀 더 기획자와 참여자의 작가주의 성향이 드러난다면, ≪서울, 25부작≫의 경우, 서문을 통해 드러나는 기획자의 방향성보다는 참여작가의 짧은 후기로 대체했고, 대체로 다양성과 공정한 과정 집행을 사이트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이것은 최황이 쓴 “관-제도”라는 말과 공명한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웹사이트 디자인은 두 프로젝트에서 모두 중요한데, 왜냐면 두 경우 모두에서 서울시에 분산되어 있는 개별 작업을 총괄하는 아이덴티티는 오로지 웹사이트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란 메가-데이터베이스, 어떠한 필요와 판단 이전에 이미 무지막지한 양의 정보가 내 편이라고 믿게 만드는 상호수동적 매체의 시대다—인터넷에 있다면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 끝을 시작으로 습관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타임라인 속에서 가시성 있게 포착되는 이미지는 단순하게 작업된, 말하자면 포스터의 그래픽 디자인이다. 누가 그의 작업을 보러 친히 전시장을 찾을까? 따라서 최근 담론에서 디자인은 예술의 가장 바깥쪽을 감싸면서 거기서부터 안을 향해 예술을 정의하고 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웹사이트에 올라오는 짤막한 소개와 파편적인 이미지가 결국 실질적인 작업의 프레젠테이션이다. 그런 면에서 웹사이트 디자인은 프로젝트 자체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고 프레젠테이션하는 중요한 미적 형식이며, 거듭 최황이 지적한 문체는 프로젝트 전체를 통틀어서도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8] 확실히 최황이 지적한 어떤 종류의 문체—예를 들어 타이포그래피 중심의 미니멀한 기능주의적 레이아웃—는 두 프로젝트가 확실히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어떤 면에서 일상의실천이란 디자인 스튜디오가 가진 독특한 저자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동상이몽

그래서 무엇이 문제란 말일까? 최황은 웹사이트의 형식을 “전시의 구조”라고까지 이야기한다.[9] 앞서 최황은 두 웹사이트의 문체가 유사함을 지적했는데, 거듭 문체는 저자의 독특성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여기서 되돌아오는 질문. 일상의실천이 가진 ‘문체’, 즉 독특성은 최황의 전시의 구조가 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질문은 일상의실천은 그 문체를 최황이 차용하도록 허락해줬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가지 문제는 사실 공공미술 사업에서 다른 형태로 빈번하게 일어난다. 전자는 예술가가 참여한 관급 사업에서 자주 보이는데, 이때 행정가 입장에서 예술가는 용역이고 작업은 물품이자 자산이다—행정적 프로토콜에서 그런 격이다. 따라서, 결과물에 관해 기관은 배타적 소유권을 가지며, 참여한 예술가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성공적일 경우 그것은 담당자나 관리자, 기관의 실적으로 홍보될 것이며, 운이 나쁘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같은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별다른 특약이 없다면 대체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여기서 예술가의 자리는 차라리 디자인 업체다.

후자의 경우 속되게 말해 공공미술의 업자를 떠올려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업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알다시피 자신의 예술혼을 다른 사람에게, 느낌적으론 부적절하게 팔아넘기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지방의 홍보 캐릭터 조형물이 때가 되면 인터넷 밈으로 주기적으로 떠돈다. 대부분 지방의 공무원의 미감이란 일반인 평균에 운 좋으면 가깝거나 대부분 미달한다. 이런 공무원과 가장 시너지가 좋은 사람이 업자 예술가인데, 이들은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구에 최대한 부합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줄 뿐이다—이유는 다양한데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실적일 때도 있다. 무엇이 좋은 예술인지 판단할 수 없다면 쉬운 방법은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며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 공원이나 휴양지에서 항상 보게 되는 것이 땡땡 미대 교수의 어시스턴트가 열심히 만들었을 조형물이다—그런데 이 업자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평가가 일하기 편한 디자이너의 긍정적 요건이 된다.

작가의 경우 문체는 오로지 자신에게 귀속된다. 반면 업자는 문체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다. 이를 다시 돌아와서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근대 이후 예술가는 자율적 대상을 디자이너는 도구적 대상을 만드는 것으로 분화했다. 두 가지 상반된 미술의 단면이 일상의실천과 최황의 예에서 봤듯이, 공공미술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이따금 충돌한다. 우리는 왼쪽을 보면서 오른쪽을 볼 수 없으므로, 지금은 둘 다 가능하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은 되도록 피하자. 공공미술은 예술일까 디자인일까? 공공의 이익, 그러니까 되도록 많은 사람의 만족이 중요하다고 믿을수록 공공미술은 디자인에 가까워진다. 반면 독특하고 자유로운 표현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공공미술은 예술에 가까워진다. 작가주의를 밀어붙인 경우, 작가로서 성공은 차치하고서라도 클라이언트에 만족을 주지 못해 실패한 디자이너가 되기에 십상이다—이럴 경우 작업에 붙은 대부분의 별칭은 흉물이다. 디자이너로서 클라이언트의 만족에 가까워지면 실패한 작가라는 평가를 피하기 힘들다—별칭은 역시 업자다. 이렇게 공공미술에 대한 이중잣대는 자유롭고 독창적인 표현이 최대한 다수의 사람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가능할까?

실로, 최황과 일상의실천은 동상이몽을 꾸었다. 최황의 야심은 디자인을 예술로 끌어당기는 것이었지만, 종국에 드러낸 것은 모더니스트적 독단적 저자성이다. 이는 최황이 작가로서, 큐레이터로서, 참여작가를 섭외하고, 또 디자이너를 섭외할 때 주문했던 모순적인 위치성—충분히 독창적이면서도 자기 목적성을 가지면 안 된다는—을 독단주의적으로 편취한 것에 기인한다. 여기서 일상의실천은 큐레이터의 생각을 표현해주는 수단, 즉 디자이너일 뿐이다. 반면, 일상의실천은 나쁜 업자와 착한 업자 사이에서 진동한다. 일상의실천은 정반대의 취지를 담고 있는 전시에 같은 계열의 작품을 보낼 정도로 의식이 없는 업자-작가이거나, 혹은 클라이언트의 의제에 부합하는 무언가를 안 되는 여건 속에서도 제공해주는 착한 업자-디자이너다. 이런 일상의실천의 위치는 최황과 일상의실천 모두 절대로 바란 것이 아니었겠지만, 봤다시피 구조적으로, 시작부터 그렇게 되어 있다.

소결

이 웹사이트를 둘러싸고 벌어진 자그마한 해프닝은 그래서 우리가 공공미술을 볼 때 부과하는 교묘한 이중잣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심급에 구조화되어 있는 것은 예술과 디자인이라는 분화된 학제가 서로의 위치를 고수한 채 씨름하고 있는 줄다리기며, 이는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 사이의 익숙한 반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혹은 서로를 편취하는 것 이상이 가능할까? 최황이 바랐던 것처럼, 예술과 디자인은 동료가 될 수 있을까? 같이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상태일까? 모두의, 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예술이란 게 가능이나 한 것일까?

한 가지 사례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장근희와 김태균은 2015~2017년 <파지키트>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는 경기문화재단의 문화 바우처 사업으로, 보통 차상위 계층에 문화상품권 따위를 나눠주는 것으로 일이 진행된다—사업의 성격상 여기서 독특한 예술 실천이란 기대되기 힘들다. 당시 경기문화재단 사업 담당자였던 류혜민은 예술가를 채용해 관례적인 무언가를 넘어보자 했다—그렇다고 해서 ‘문화를 나눈다’라고 하는 현물 지급의 성격이 바우처 사업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파지키트> 프로젝트에서 바우처 대상으로 주목한 건 파지 줍는 노인이다. 컬렉티브가 보기에 이들이 리사이클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너무나 주변화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이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파지키트’를 디자인한다. <파지키트>는 파지를 줍고 리어카에 싣고 이동할 때 제반 효율성과 안정성을 강화시키는 도구다. 폐지를 주우면서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지압 점이 새겨 있는 방수 손 장갑이라든가, 자동차 운전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형광색 고무밴드로 만든 수레 고정끈, 파지 보관 시 비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꽃과 숲, 그리고 보석함이 인쇄된 방수 덮개 등이 이 파지키트에 담겨 있다. 이 키트는 바우처 사업이라는 한계 내에서, 차상위 계층을 대상으로 현물을 지급하기 위해 디자인된 물건임에 분명하다—더군다나 이 키트는 철저히 효율적 도구로서 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파지키트>는 도구적인 무언가를 넘어서는 면이 있다. 예술가가 상상하기에, <파지키트>는 전문가의 장비이며, 그것을 장착하는 순간, 남들이 쓰다 버린 고물을 주워다가 생계를 연명하는 불쌍한 노인은 사회의 리사이클러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파지키트>는 파지를 줍는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변신 키트, 강화 장비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물론 예술가의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상상은 독단주의라고 볼 수 없다. <파지키트>가 제공하는 어떤 효율성, 다시 말해 달리는 차와 거친 고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것을 통해 사용자는 지금보다는 더욱 나은 삶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파지키트>는 일반성—파지 줍는 노인의 스테레오 타입—을 넘은 독특성이 나타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며, 그것은 저자의 독단주의라기보다 전적으로 사용자에 달린 것이다. 이 계기는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 사이의 관계 너머의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과 디자인은 무언가 배울 필요가 있다.

[1] 최황, “제가 2020년에 아르코 후원을 받아 기획했던…”, 페이스북, 2021년 8월 19일, (접근: 2021년 9월 24일, https://www.facebook.com/eltitnu.1984/posts/1335168570212127) 
[2] 이런 언급이 특히 그렇다: “디자인은 모두 일상의실천이 맡았습니다. 일단 그래서 표절까지는 아닌 것 같고요.” 위의 글.
[3] 최황, “<서울, 25부작>을 기획한 관계자들, 정말 창피한 줄 압시다.”, 페이스북, 2021년 8월 20일. (접근: 2021년 9월 24일, https://www.facebook.com/eltitnu.1984/posts/1335961470132837)
[4] 위의 글.
[5] 최황은 자신을 큐레이터이자 작가로, 일상의실천을 작가이자 디자인 에이전시로 모호하게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뒤에 다루겠다. 최황, “정말로 잘못한 게 0.1g도 없기 때문에…”, 페이스북, 2021년 8월 26일, (접근: 2021년 9월 24일, https://www.facebook.com/eltitnu.1984/posts/1339853853076932)
[6] 일상의실천, “최황 작가의 ‘게으른 디자이너’라는 비난에 대한 답변,” 페이스북, 2021년 8월 23일. (접근: 2021년 9월 24일, https://www.facebook.com/ilsanguisilcheon/posts/2617072175094179). 이후 일상의실천의 인용은 모두 여기.
[7] 최황, “정말로 잘못한 게 0.1g도 없기 때문에…”
[8]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 웹사이트가 이렇게 중요하게 디자인 된 경우가 과거에는 흔치 않았는데, 이는 여러 미디어 환경의 재편성과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인터넷이라는 담론이 시사하듯, 현재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구별은 무의미하며, 웹사이트 자체가 작업의 결과물로 프레젠테이션되거나 관급 전시에서 3D 시뮬레이션으로 전시를 공개하는 등 이런 현상은 포스트-코로나를 경유하며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 관해선 다음의 기사를 참고할 것. “[국현 온라인 좌담회②]포스트코로나 시대, ‘미술관 역할’의 지속적 논의 필요”, 서울문화투데이, 2020년 7월 24일, (접근: 2021년 9월 24일,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219)
[9] 최황, “<서울, 25부작>을 기획한 관계자들, 정말 창피한 줄 압시다.”

2021. 11.

신세대 담론의 작은 역사: 2013-2016

이 에세이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벌어진 세대 담론을 살핀다. 여기에 관해서는 다양한 논평들이 이미 나왔지만, 나 또한 여기에 일정 부분 가담한 자로서 개인적으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럼에도 이 주제를 굳이 다시 꺼내든 것이 개인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세대 담론이 출몰하게 된 배경은 여전히 미술계에서 문제적이며, 이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주목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다고 본다. 이 글을 통해 살피고자 하는 것은 그 배경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과정을 살필 수는 없으므로 중요한 세 장면을 꼽았는데, 그것은 2013년 미술생산자모임의 토론회, 2014년 홍태림의 공장미술제 비판, 2015년의 ≪굿-즈≫와 신생공간이다. 앞으로 이 글은 세 장면의 연관 관계를 검토하면서 세대 담론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소 두서없이 앞뒤를 왔다 갔다 할 텐데, 난삽함에 미리 양해를 구한다.

세대교체 이론?



▲ <청년 작가로 사는 길은 멀다>, ≪더무브≫, 2014.

2013년 통의동 시청각에서 미술생산자모임의 공개 토론회가 열린다. 미술생산자모임은 2012년 총파업 퍼레이드의 참가자 일부가 만든 단체로, 미술창작환경과 미술제도의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삼는다.[1] 이 행사는 그들의 첫 번째 공개토론회로, 좁은 장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를 모았다. 현장의 작가뿐만 아니라 공립 미술관 큐레이터, 대안공간 및 큐레이터, 심지어 예비 작가나 비미술계 인물까지 몰렸다는 것은 이들이 내세운 주제가 사회적 인식 어딘가를 찔렀다는 것을 분명하게 방증한다. 발표는 경제적 곤궁에 관한 젊은 작가의 경험담으로 포문을 열어, 문화 행정의 부조리를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을의 분노’를 쟁점화하려고 했는데, 그중 여러 번 반복됐던 화두 하나는 ‘아티스트 피(artist fee)’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었다.[2] 요컨대, 국공립미술기관의 전시 참여 시 정당한 사례비를 요구하자는 것이다.

이 도발적인 화두는 당장의 큰 반향을 이루어 내는 대신 유령처럼 미술계를 떠돌았다. 그러다가 다시 공론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듬해 「제4회 공장미술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하여」라는 홍태림의 글에서였다. 이 글은 “날림 기획을 통해서 학생 작가들에게 좋지 않은 무대를 제공”했으며, “참여한 학생 작가에게 사례비를 주지 않은 점”을 들어 공장미술제가 작가를 착취했음을 통렬하게 비판했는데, 그가 참여 작가에게 촉구한 제안은 이런 것이다. “회화작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그 자리에 뒤집어서 놓아버리고, 비디오 작품을 출품한 작가들은 자신의 비디오 전원을 꺼버리자. 설치작품을 출품한 작가들은 자신의 설치 작업을 걷어버리자.”[3]

홍태림의 비판은 SNS상에서 공감을 얻으며 당시 현대미술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당시 총괄 디렉터였던 서진석은 토론회를 열어 급한 불을 진화하기에 나선다. 하지만 이것이 외려 불쏘시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토론회에서 사회자로 나선 미술비평가 임근준은 현대미술계에 대안공간 세대로부터 공공연한 청년 착취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대안공간 시대를 종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4] 이로써 미술생산자모임이 한 차례 제기했던 젊은 작가의 현실적 곤궁의 문제는 세대 갈등으로 번지게 된다.

실로 임근준은 독특한 세대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위기의 한국현대미술계와 청년 세대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2013년의 글에서 이미 그는, IMF 금융 위기 이후 유학파와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2000년대 미술 현장을 한 세대적 특징, 심지어 “한국당대미술의 황금기”로 간주하고, 2006년 미술시장의 버블이 2008년 금융위기를 지나면서 와해되는 과정에서 88만원 세대가 큰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5]


2013년 현재, 그들은 마땅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가난에 허덕이며 국공립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돌며 간신히 창작을 이어나가고 있다. 정치적 세대화의 기회를 잡지 못한 그들은, 구세대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무한 반복하며 양질의 전시 기회가 오길 갈망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나타날 기미가 없다. / 국내의 힘 있는 큐레이터들의 면면을 보면, 대개 1950년대 후반생, 1960년대 초중반생이기 때문에, 아랫세대에겐 여간해선 좋은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다. 동년배 작가들과 작업하기에도 바쁜 기득권자들에겐, 197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난 작가들에게 애정을 표할 의지나 여력이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88만원 세대에서 그에 대적할 만큼 힘 있는 큐레이터나 평론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이러다 대가 끊길 판’이라는 한탄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젊은 세대의 작가 일군은, 386세대들이 일군 담론적 얼개에 맞춰 창작하는 몹쓸 경향을 뵈기도 한다. 주류 미술계의 말단 자리에라도 앉고 싶은 것일까?[6]


기실 정체성 정치와 세대론을 합쳐 놓은 듯한 이런 관점은 우석훈과 박권일이 쓴 2007년의 화제작 『88만원 세대』의 요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7] 두 저자가 보기에 IMF 경제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급속도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속으로 편입되며, 그 후 10년, 무한대의 경쟁과 유래 없는 승자독식제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이때 벌어지는 “배틀 로열”은 이들이 보기에 “세대 내 경쟁”이기도 하지만 “세대 간 경쟁”이기도 한데, 여기서 20대, 즉 88만원 세대는 부모뻘의 유신 세대와 삼촌뻘의 386세대 사이의 경쟁에서 필연적으로 불리한 위치를 점한다.[8]

오늘날 대부분의 조직에서 인사권을 가진 세대는 유신 세대이지만, 곧 그 권한은 386세대로 넘어갈 것이다. 이 상황에서 별도의 그룹을 만들지 않을 확률이 높은 20대의 아주 일부가 윗세대에게 ‘포섭’되어 대다수의 20대를 소외시키는 일들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 이걸 밖에서 보면 ‘20대가 20대의 적’이라는 상황으로 해석될 것이다. 20대에게 주어진 승자 독식 게임은 사실 세대 간 경쟁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매우 거칠고 불행한 승자 독식 게임이다.[9]


임근준이 말하는 대안공간 세대는 거칠게 두 저자가 말하는 (아마도 X세대를 포함하는) 386 세대에 해당할 수 있으며, 얼핏 20대에게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고 권유하는 우석훈, 박권일과 “대안공간 루프의 운영을 중단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임근준과, “회화작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그 자리에 뒤집어서 놓아버리고, [...] 설치작품을 출품한 작가들은 자신의 설치 작업을 걷어버리자”고 문제제기하는 홍태림의 모습은 기묘하게 겹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88만원 세대의 임근준 판본에는 더욱 비관적인 의식이 깔려 있는데, 2009년 ≪주간 한국≫에 기고했다는 글은 이를 다소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한국 현대사를 10년 단위로 끊으며 “세대전쟁”의 서사로 나열하는 이 글에서, 임근준은 88만원 세대에게 386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 판도를 전복할 힘이 없으며, 이들과 386의 자녀 세대, 즉 88년 유학 자유화 이후의 조기유학세대와의 경쟁에 관해서도 “글쎄”라고 진단하고 있다.[10] 임근준은, 또한 이 글에서, 자신이 이 세대 간 전쟁을 엘리트 사이의 전쟁으로 본다는 점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큐레이터를 작가의 대변자로 위치시키며, 88만원 세대 작가가 대변자를 갖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논리와 거의 같다.[11] 이렇게 우월한 개인을 우월한 세대와 동일시하고 세대 사이의 생존 경쟁을 자연법칙화함으로써, 임근준 버전의 ‘88만원 세대’는 보수 우파의 논리와 가까워지며, 그런 의미에서 그가 자기계발 담론에 관심을 둔 것은 필연일지도 모른다.[12] 실로 한 때 굉장한 유명세를 탄 그의 「대학 졸업을 앞둔 예비 작가에게」는 “배틀 로열”에서 승리하기 위한 실용적인 병법서이자 88년 태생의 세대에게 보내는 구애이기도 한 것이다.[13]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세대 내/간 갈등을 유사 우생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공장미술제에 매끄럽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알다시피 공장미술제는, 좋든 싫든, 젊은 작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기획이었다. 만약 이 싸움이 세대 간 갈등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88만원 세대 담론이 세대 간 이기주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서진석은 루프 세대의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줬어야 말이 되지 않을까? 이런 견지에서 보면, 서진석의 제4회 공장미술제는, 성공적이었든 그렇지 않든, 386세대가 보유한 자산을, 자신의 세대가 공유하는 어떤 윤리관, 아마도 연대의 미덕을 경유해 아래 세대를 향해 확대한 결과일지도 모른다.[14] 유진상의 말처럼, 오히려 “기성세대라고 토론에 나선 서진석, 김노암 등은 사용자라고 하기엔 턱없는 개인”이고, “지난 15년여의 기간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대안공간을 묵묵히 꾸려온 ‘자원봉사자’ 같은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15] 그렇다면 두 세대가 경험하고 있는 미술계 내 조건이 크게 다른 것일까?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기회특정적 세대

여기에 답하기 전에 빠르게 이후의 상황을 갈무리해 보도록 하자. 새로운 세대의 호명을 향한 응답은 2014년 말 나와 내 동료가 조직했던 좌담회 〈안녕 2014, 2015 안녕?〉가 처음 시도했고, 2015년의 이른바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이라는 슬로건으로 본격화된 이후, ≪굿-즈≫를 필두로 ‘신생공간’으로 짧게 형상화된 다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2016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울 바벨≫과 함께 상징질서 내 어떤 위치를 점한 것과 동시에 일단락 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궁금한 것은, 무엇이 그들 자신을 (대안공간 세대에 비해) 새로운 ‘세대’라고 인식하도록 만들었는지다. 권시우는 “동세대”의 일원으로서 〈안녕 2014, 2015 안녕?〉 좌담회 이후의 새로운 세대의 움직임에 관해 주시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은 대체로 일관되게 대안공간 세대로부터 새로운 세대를 분리해 내려고 노력한다.

〈안녕 2014, 안녕 2015?〉에 패널로서 참석한 이들이 운영하고 있는 대안공간들은 90년대 후반에 성행했던 대안공간들과는 결이 사뭇 다르다. ‘미술계 키드’로서 상징되는 90년대 후반의 대안공간들이 키드 이후의 키드들을 재생산하기 위한 일종의 인큐베이팅 구실을 했다면, 2010년대 이후의 대안공간들은 일군의 젊은 작가들을 특정한 전시 담론 안으로 소급해내더라도 그 ‘이후’의 경로에 대해선 제도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상태다.[16]

이 글에 따르면 90년대 대안공간과 2010년대의 대안공간은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90년대 대안공간이 작가를 제도에 링크시키는 기능을 했다면, “2010년대 이후의 대안공간,” 즉, 이후 신생공간이라고 불리게 될 세대적 조건은 그것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권시우는 단호하게 “문화적 불모”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제 청년세대 미술에 남은 유효한 “전제조건”이 그 “불모 자체를 의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상태참조〉에 관한 그의 독해는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상태참조〉는 엄밀히 말하자면 작가 아닌 이들이 최소한의 여건만을 갖춘 공간에 모였을 때, 외려 어떤 ‘작가적 상황’이 연출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모의실험”에 가까우며, “임대라는 성질을 작업과 병행하며 의식화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러고선 이렇게 덧붙인다. “이때의 임대는 굳이 〈상태참조〉가 무대로서 삼은 임대공간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 역시 기성 미술 제도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포트폴리오라는 제도를 경유해야만 하고, 이때 촌각을 다투며 경연되는 작업들의 개요는 각자가 선점한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작동되기 때문이다.” 권시우는 신생공간, 더 정확하게는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임대”적 네트워킹 방식 자체가 “세대적 습성과 가장 부합되는 지점에서 마련된 공론장,” 다시 말해 “대항제도”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주지했지만, (권시우 자신이 지적했듯이) 〈상태참조〉의 모의 프레젠테이션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기성 제도를 향한 “세대”적 강박 역시 역력하다. 아니라면 〈상태참조〉의 형식이 오늘날 관례화된 커리어의 프로토콜, 다시 말해 작업계획서를 쓰고 프레젠테이션하고 선발되어 전시하는 “임대”적 과정을 굳이 모방할 필요가 있었을까? 거듭,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관 신설을 요구하는 행동주의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그것이 비록 ‘액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어떠한 망령에 사로잡혀 있을까? 의태라는 전제 조건이, 거듭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전제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만약 이들에게 세대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실로 양가적으로 보인다. 표면 위로는 제도를 향한 냉소를, 표면 밑으로는 제도를 향한 열정을 동시에 깔고 있으며, 이 둘은 ‘기회’를 계기로 이따금씩 서로 교차하거나 반전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 88만원 세대 담론이 형상화하고 있는 20대의 모습이 겹쳐진다. 희망적인 판본을 보자면, 당시 프레젠테이션의 장소에 진입할 커리어도 지니지 못했던 이름 없는 젊은 작가/지망생은 (교역소 같은 신생공간의 경우처럼) 그들만의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거나 (청년관의 경우처럼) 짱돌을 든다. 하지만 다소 암울한 판본 역시 존재하는데, 여기서 젊은 세대는 여전히 “개미지옥 게임”을 냉혹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다.[17] 이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한 가지 예는 다음의 문답이다. 〈안녕 2014, 2015 안녕?〉 좌담회에서 임근준은 〈상태참조〉를 만든 교역소를 “기회특정적”이라고 부르며, 현대차 프로젝트 같은 거액의 기회가 오면 어떻게 할지를 물었는데, 김영수가 대답하길, “저희는 2억 받으면, 꼭 똥을 싸고 싶진 않겠죠, 똥을 싸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받으면 합니다. 저희 아까 얘기했, 기회 특정적? 이런 이야기 하셨는데. 사실 여기 공간도 그렇고 그게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기회가 오면, 합니다 저희는.”[18]

대안공간 이후

다시 공장미술제로 돌아오자. 이 전시와 관련해 90년대의 기성세대와 2010년대의 신세대 사이에는 어떤 인식차가 있을까? 같은 글에서 홍태림은 공장미술제의 문제를 두 가지로 꼽는다. “첫 번째는 날림 기획을 통해서 학생 작가들에게 좋지 않은 무대를 제공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참여한 학생 작가에게 사례비를 주지 않은 점이다.” 그런데 그는 이어서 “꼭 돈이 아니더라도 기획을 하는 주체들이 좋은 기획을 통하여 작가와의 신실한 만남을 추구한다면, 어려운 재정 여건 속에서도 의미 있는 창작문화를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재차 주장한다. 요컨대, 돈은 중요하지만 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좋은 기획”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장미술제가 만약 서진석의 기획의도대로 흘러가 온전히 양질의 기획/기회를 제공했다면 문제는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큐레이터의 역할론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단연코 큐레이터는 작가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것이 효과일 수는 있다.) 큐레이터 역시 미술계 내 창작 행위에 종사하며 제 나름의 예술적 가치관을 (주로) 전시의 형태로 제시하려는 욕망을 가진다는 점에서 작가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창작자의 위치는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창작자가 같은 전시를 위해 모였다고 하더라도, 가장 성공적일 때도, 가장 실패할 때도, 두 작가가 서로 다른 만큼 큐레이터와 작가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좋은 기획이란 무엇일까? 창작이 그렇듯이 이 정의는 실로 모호해서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의도와 결과가 반드시 일치한다는 보장도 없다. 이 관계는 토의되어야 하는 미술과 미학의 주제이고 나는 이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홍태림의 글에서 좋은 기획의 정의나 공장미술제의 기획적 실패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홍태림은 우회를 시도하는데, 사례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점, 작품 명제를 작가가 직접 제작하고 붙이게 했다는 점, 작가에게 지킴이를 요청했다는 점 등을 들어 “기본적인 과정이 누락된 이런 기획전시에서 생산적인 그 무엇도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홍태림에게 기획력은 좋은 행정력과 동일하거나, 최소한 좋은 행정력이 없다면 좋은 기획도 배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9] 따라서 앞서 한 차례 살폈듯이, 홍태림은 돈보다 좋은 기획을 주장했지만, 역설적으로 좋은 기획은 진행비를 갖춰서 원활하게 돌아가는 행정력에서 나오며(진행비가 없는 원활한 행정력은 곧 행정 인력의 착취를 의미한다), 사례비는 그런 점에서 기획의 실패 후 나중에 되찾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근본적인 차원을 가진다. 곧, 일을 제대로 하려면 돈과 제도적 기반부터 준비하라는 것이다. 아니면 시작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홍태림의 ‘돈보다 좋은 기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시아프와 상업 갤러리의 100만원짜리 대관 전시를 냉소하고, “작가와의 신실한 만남”을 강조하는 것으로 봤을 때, 홍태림은 기획자에게 전시의 순수성/비상업성과 참여 작가가 인정할 만한 진정성을 요구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순수성과 진정성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알 수 있는 것은 홍태림이 사례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계속해서 ‘좋은 기회/무대’를 동어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잠깐 홍태림이 순수성과 진정성의 반대말로 사용한 ‘동원’이라는 말을 잠깐 곱씹어 보는 것은 유용할 듯하다. 일상적 감각에서 동원이란 말은 어떤 집단에 비자발적으로 예속되어서 권력 관계에 의해 원치 않는데도 무언가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용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분명해 보이는 것은, 젊은 작가/세대에게 비친 미술계는, 유진상이 본 것과는 다르게, 개별화된 창작 행위자의 우연한 조합이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업장이라는 사실이다.[20] 여기서 젊은 작가에게 기성 큐레이터/세대는 이 업장의 권력으로 비친다. 즉 거칠게 말해 그들에게 선택되면 출세하고 찍히면 이 업장 내에서 매장된다는 것. 이 틈에서 ‘노오력’하면서 기회를 엿봐야 한다는 것. 이것은 여전히 한국의 거의 모든 조직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자연 법칙으로, 과거 미술계에는 ‘10년만 버티면’이라는 신화가 있었다. 하지만 신세대가 보기에 업계의 주기는 훨씬 더 짧아졌으며 좀 더 확실한 미래적 절차가 없다면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다. 기회특정성의 담론이 발생한 것은 여기가 아닐까?

이런 견지에서, 젊은 작가/세대가 인식하는 몇 가지 전제, 첫째, 젊은 작가는 나를 알아봐 줄 좋은 무대가 필요하고 둘째, 미술계는 출구 없는 거대한 업장이며, 셋째, 서진석/기성 큐레이터는 업장의 권력이다가 사실이라면, 공장미술제야말로 (최소한 표면적으로)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좋은 기회’이기에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를 위해서라면 동원에 의한 내 개인의 노력과 손실은 감수할 만한 일종의 투자이기도 한 셈이다. 이 지점에서 홍태림은 물음표를 친다. 서진석이 대안공간 루프에서 동료 작가와 함께 씬(scene)을 만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공장미술제는 젊은 작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능력함’을 판단한 근거가 한 차례 살폈듯이 작가적 대우의 부실함이며, 이것의 근본적인 문제는 행정력에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젊은 작가는 너무 앞질러 갔다고. 실로 공장미술제에 참가한 작가는 프로라기보다 아직 아마추어에 가까운 학생이며 이들은 앞서 살핀 것처럼 소위 ‘인큐베이팅’을 원하는 처지에 있다. 그럼에도 공장미술제에서 주요 비판 중 하나는 프로에 준하는 작가 대우에 관한 것이었다. 사례비를 지급하지 않고 명제판을 붙이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참여자를 작가 대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기획자가 보기에 현실적으로 아마추어/신진 작가에게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된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작가이고 싶기에 공장미술제에 참가했으나 작가 대우를 받지 못해서 이들은 화가 난 것일까?

여기에 인식차가 있다. 기성세대는 공장미술제를 작가의 예비 단계의 어디쯤으로 생각하지만, 신세대에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커리어다. 그 당시 우후죽순 생긴 국공립과 민간의 인큐베이팅/지원 프로그램은 어떤 과정을 거쳐 작가가 만들어지는지를 미술계에 다소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또한 이 제도에도 분명히 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좋은 프로그램에 선정되는 것이 나중에 좋은 기회로 이어진다. 예컨대, 인사미술공간에서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거기서 개인전을 개최한 다음 국공립/해외 레지던시와 그룹전을 돌다가 혹시나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모색의 라인업에 들어간다는 ‘꿈 같은’ 커리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 공장미술제도 신세대에게는 자신이 실험성을 시험할 수 있는 드문 기회의 장이라기보다 수많은 인큐베이팅 제도 중 하나의 옵션이다. 갓 미술계를 향해 발을 디딘 신세대에게 비친 미술계는 이미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 업계라고 봐야 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다름 아닌 대안공간 세대가 미술계에 갓 나왔을 때 경험하지 못했던, 하지만 그들이 이후에 미래 세대를 위해 구축한 시스템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론은 다소 싱거운데, 서진석이 공장미술제를 통해 야심차게 제시했고 홍태림이 그것을 비판하고 또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모두 동일하게 (제대로 된) 새로운 작가 발굴, 인큐베이팅 시스템이다. 여기서 좋은 기회란, 나를 미술계에 제대로 부각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의미하며, 이것이 가능하다면 사례비는 무시해도 좋다는, 어쩌면 90년대 대안공간이 만들어온 잔해를 그대로 반복하는 주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이 동원되는 줄 알면서 전시에 참가한 이유는 어떤 점에서 ‘제대로’ 동원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서진석은 자신의 미술계 내 권력으로 동원의 결과를 보증해야만 했다. 문제는 한 차례 살폈듯이, 더욱 좋은 조건의 지원제도가 많은 시점에서 공장미술제는 그리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때문에 서진석의 입장에서 공장미술제는 여전히 신진작가 발굴을 의도한 대안적 지점에 위치한 기획이지만, 홍태림이 보기에 그 대안성이란 이미 실효성 없는 제스처에 불과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의미에서 공장미술제를 향해 터져 나온 신세대의 불만을 유진상이 일종의 노사 관계로 보거나 임근준이 갑을 관계로 본 것은 어떤 의미에서 타당해 보이지만, 서진석이 진정한 사용자나 갑이라고도 볼 수 없다. 홍태림 현상에서 볼 수 있듯, 공장미술제가 이미 철지난 시대착오적인 무용한 대안이라고 비판받은 그 지점에서 이미 최소한 레임덕에 진입해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임근준의 지적은 지나가면서 한 말임에도 의미심장하다. “서진석씨가 보다 심각한 비도의 인물들에 비해서 비판하기 쉬운 상대이기 때문에 비평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21]

그렇다면 서진석은 이 시점에서 왜 여전히 이런 “공회전” 전시를 강행했을까? 어떤 이익을 위해? 여기에 관해 임근준은 관례화된 지원금의 문제적 사용을 명쾌하게 지적한다.

내가 알기론, 지원금에 의존하는 대안 기관과 대안적 페스티벌의 기획에서, 이런 문제는 통상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다. 지원금에 기획비가 포함돼 있지 않다보니, 왕년엔 의욕적인 독립 큐레이터들이 사비를 탕진해가며 전시를 강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옛말이고, 이제 지원금의 중복 수령, 지원금의 변칙 운영은 상식처럼 미술계에 떠돌고, 반복되는 일에 지친 기획자들은 타성에 젖어 젊은 작가들과 큐레이터 지망생들을 소모품처럼 다루기도 한다. 작가가 개인 자격으로 받은 지원금을, 기획자 측이 마치 제 덕에 받은 돈인 냥 행세하며 예산 집행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다. 약자의 위치에 처한 작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기획자의 지시에 따르거나, 아니면 초청 수락을 취소하고 지원금을 반납해버리기도 한다.[22]

사실, 어떤 면에서는, 한국의 동시대미술 현장에서 대안공간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에도 “기회특정성”이 강력하게 개입해 있으며, 이것이 지원금과 시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끝내 대안성이 몰락하게 된 근본 원인일지도 모른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갤러리 킹을 운영했던, 스스로를 대안공간 세대 중에서도 “중간 세대”라고 칭하는 바이홍은 사단법인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가 설립된 2005년을 의미심장하게 지목한다. 그는 이 법인의 발족에서 두 가지 의문점을 떠올리는데, 그중 하나는 “사단법인 전환을 통해 드러났던 그간의 어떤 필요성,” 다른 하나는 “‘비영리’라는 문구가 내비치고 있는 지향성”이다.[23] 바이홍은 전자를 2000년 5월 문화관광부가 수립한 대안공간 지원책으로부터 시작해, 노무현 정권의 문화예술정책 기조인 사단법인 요청의 흐름으로 본다. 반면 후자의 경우, ‘비영리’는 그즈음부터 시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대안공간이 스스로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레토릭이다.[24] 다시 말해, 결과적으로 대안공간은 비영리를 표방하면서도 국가재원을 조달해 작가를 키워 시장으로 내보내는 창구로서 기능했다는 것이다. 2005년 아라리오 갤러리가 대안공간 작가를 대거 영입한다. 바이홍이 박진감 넘치게 묘사하는 이후의 상황은 파란만장하다. 길게 인용해보자.

2000년대 중반까지도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그 어느 때보다 잘 판매되었고, 팽배한 기대감이 그들을 벅차게 했다. 이러한 열기는 전세계 주요 미술시장의 흐름과 동일선상에 있었다. 미국 학부 졸업생들의 포트폴리오가 바로 주류 상업 갤러리에 넘겨져 전시/판매된다는 소식은 동시대 한국 미술작가들에게 더 큰 영역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당시 아라리오갤러리 전속이 된 모 작가의 ‘영문 홈페이지’는 그런 현상의 반영이었다. / 작가뿐만 아니라 대안공간 운영자들에게도 일거리들이 넘쳐났다 국가와 지역을 기반으로 한 행사들이 곳곳에서 펼쳐졌고, 대안공간은 컨텐츠의 주요한 인적 인프라가 되었다. 대안공간의 재정 상황이 나아지며 운영이 수월해지는 듯도 보였다. 또한 일반 대중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극대화되었다. 그림 가격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가끔은 구매로 이어지기도 했다. 전에는 없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홍대 앞은 그런 여러 가지 분위기를 복합적으로 지닌 지역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가장 많은 수의 대안공간들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전시를 위해 벽면이나 주차장 등을 내어주는 카페와 술집 등이 곳곳에 들어섰다. 그런 흐름을 따라 2008년 카페 아트마켓이 기획된다. 신생갤러리와 카페들이 연합해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했다. 몇몇 콜렉터들이 소위 갤러리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작품을 감상하고 구매하였다. 젊은 작가들은 그런 콜렉터들과 자주 만남을 가졌고, 대안공간의 디렉터와 큐레이터는 그들의 선생님 역할을 겸했다.[25]

여기까지가 행복한 서사다. 하지만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미술시장의 버블이 급속도로 꺼지면서, 대안공간의 큐레이터와 작가는 갈 길을 잃는다. 이들이 찾은 다음은 어디일까? 이 시점부터 미술계는 공공영역 의존도를 급속도로 높여간다. 국공립미술관에서도 동시대미술 (신진)작가의 소환이 잦아지며, 동시에 대안공간의 주요 작가는 하나 둘씩 제정된 미술상을 연달아 수상하기 시작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잠깐 주목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달라져 있는 (대안공간) 큐레이터의 위상이다. 바이홍의 묘사에서도 간간히 드러났던 것처럼, 이 시기를 거치면서 “선생님 역할”을 했던 큐레이터는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한다. 대규모 예산을 조직하고 집행할 수 있으며, 전시라는 플랫폼을 통해 작가를 이리저리 키워낼 수도 있다. 심지어 전시마다 작성되는 서문은 잡지 등 제한된 지면을 가지는 비평가보다 훨씬 폭넓은 비평의 기회를 큐레이터에게 허락했다. 더군다나, 지원금 제도 인프라가 더욱 활성화되면서 이들은 주요 심사위원 풀을 구성하게 되었다.

큐레이터와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공공영역의 보조금 장악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제 공공기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심사까지 하는 대안공간/큐레이터는 마치 국가가 보증한 준 공공기관 격의 위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공장미술제가 “조잡한 무대”임에도 불과하더라도 신세대가 간과하지 못하고 동원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홍태림이 벗어나자고 주장했던 권력 관계다. 또한 보조금은 대안공간의 운영 면에서도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는데, 임근준이 앞서 설명했듯이, 앞선 호황의 시대에 감수했던 ‘도약’의 반동을 보상하기 위해서 좋든 싫든 지원금을 통해서 재정난을 해소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서 공공영역의 보조금이 문화생태계의 진흥, 공장미술제의 경우 신진작가 발굴도 그렇지만, 부실한 공간 자체의 구멍을 메우고 생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다. 여기가 홍태림이 그 무대의 비효능을 비판하는 지점이며, 그럼에도 서진석이 그 무대를 끈덕지게 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를 통해 진정한 사용자/갑, 열망과 냉소의 대상이 사실 서진석이나 90년대 대안공간이 아니라 (물론 둘이 종종 겹쳐 있더라도) 지원-제도 담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공장미술제의 서진석을 홍태림은 갑으로 놓았지만, 서진석 역시 지원-제도 속에 예속되어 있다. 세대 이론은 이 지점을 흐릿하게 만든다. 임근준이 함영준과 현시원에게 노골적으로 요청했던 것은 말하자면 세대 내 대표성을 가지고 세대 간 전쟁에서 이겨 기성세대의 권력을 아래로 내리자는 것이다.[26] 그런데 이때 권력은 지원-제도 담론 내부에 얼마만큼 관여할 수 있는지라서, 사실 그 주장은 둘에게 서진석의 역할을 빼앗아 서진석이 되라는 말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그런데 세대 간 전쟁에서 우위를 점한다고 해서 세대 내 경쟁의 갈등도 해소될까? 임근준은 여기에 대해서 별다른 흥미가 없는 것 같다. 어짜피 미술은 잘될 놈들만 하는 엘리트 사이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아티스트 피와 틈새시장의 변증법

다시 2013년의 미술생산자모임 토론회로 이동해 보자. 이후의 일군의 젊은 작가가 신생공간이라는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서울관에 청년관이라는 짱돌을 던졌다면, 2013년의 이 시점에서, 미술생산자모임은 아티스트 피라는 짱돌을 꺼내 들었다. 살펴봤던 것처럼, 미술시장이 대다수 현업 작가와 거의 무관하게 작동하는 상황에서, 공공영역에서 제공하는 활동은 작가 커리어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얼마만큼 권위 있는 제도의 커리어를 많이 보유했느냐에 따라서 작가의 레벨도 대우도 정해진다. 이렇게 얼마 정도 상징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는 공공영역에 여전히 있지만(혹은 더욱 많아졌지만), 공공영역의 지원이 원칙적으로 사익 추구와 연결되어서는 안 되며, 이로 인해서 공공영역으로부터 보증되는 예술적 커리어와는 별개로, 작품이 판매되지 않는 한, 경제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이것은 사실 국공립 미술관과 그 언저리를 제외한, 대안공간과 소위 독립큐레이터, 작가 모두가 시달리고 있는 문제였지만, 당면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최우선시된 것은 공히 최고은법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였다. 관례적으로 활용되었던 수법은 공공기금의 ‘카드깡’이지만, 예술가는 이제 정당한 복지와 권리를 말한다. 왜 작가는 작업하기 위해서 범법 행위를 해야만 하는가? 전업 작가는 왜 고유의 노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위협을 겪어야만 하는가?

여기서 작가 측은 고질적으로 예산 난에 시달리는 대안공간을 일단 차치하고서, 국공립미술관을 자신에게 서비스를 의뢰하는 소비자(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소비자는 컬렉터였다)와 비슷한 자리에 위치시키며, 예술 역시 노동인 한, 정당한 대가로서 아티스트 피라는 사례비를 여기다가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고용계약의 관계냐 아니면 특수한 다른 관계냐를 따지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토론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작가가 국공립미술관을 작가 활동의 비교적 안정적인 주 무대로 인식했다는 사실과 함께, 또한 이것을 그들의 생존의 문제와 연결시켰다는 사실이다. 이런 움직임은 거듭 미술시장의 붕괴 이후 공공영역을 향한 미술계의 의존도가 급속히 높아졌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전혀 특별하거나 놀랍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그들의 눈에 국공립 큐레이터가 수퍼갑처럼 비쳐졌으리라는 것도 쉽게 짐작 가능하다. (미생모 토론에서 당시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였던 안소현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럼에도 여기 논의가 굴절되는 것은 문제 제기를 하는 작가의 위치 자체로부터인데, 아니나 다를까 문제 제기하는 제도에 기민한 작가는 대다수 알 만한 미술관이나 아트 레지던시, 지원이나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는, 제도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이른바 ‘나름 알려진 잘나가는 작가’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티스트 피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미술생산자모임의 몇몇 작가는 『88만원 세대』에서 묘사하고 있는 “매일 출근해서 8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90만원을 받”는 통계 전문가와 비슷하다.[27] 이 책에서 내세운 20대 당사자 운동의 모티베이션이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 쌓았음에도 잉여가 된 어느 명문대생의 억울함이라면, 이 문제는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아티스트 피의 문제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즉, 내 질문은 이렇다. 이 전선에 들어서지조차 못한 작가는 어디에 있을까? 이 경우 아티스트 피란 정식 예술가 자격에 대한 상응물이라도 되는 것일까? 아티스트 피 담론은 이 문제에 관해서 특별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한 듯하다.

이렇게 한쪽, 말하자면 ‘나름 잘나가는 작가’ 측에서 제도적 파이를 분배받는 투쟁 방식이 아티스트 피라면, 여기에 못 끼는 자격 조건의 작가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나는 이 집단이 앞서 살펴봤던 신생공간의 주역이라고 생각하며, 세대론적 관점을 피하는 동시에(이들은 무엇보다 세대의 대표성을 지니지 않는다) 이들이 시장과 제도 모두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제부터 장외집단이라고 부르겠다. 이들은 작업 생산 이상으로 생존 신고 격의 네트워킹을 중요한 활동으로 생각했다. 교역소처럼 아는 사람을 그러모아 일시적 카니발을 열든, 아니면 반지하처럼 작가의 이름조차 숨긴 채 언더그라운드적 활동을 진행하든, 장외집단은 기존의 전시 프로토콜을 파격적으로 무시한 채, 그들 나름의 알쏭달쏭한 소통 방식으로, 모호하지만 분명히 실체는 있는 연대감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들이 전시나 이벤트를 구성하는 대강의 방식은, 큐레이토리얼 리서치보다는, 알음알음 지인과 지인 추천을 기반으로 하며(함영준의 ≪오늘의 살롱≫이 이 증상의 원조일까?), 대부분 큐레이터가 쓴 서문이 아주 짧거나 존재하지 않고, 도록도 만들지 않으며, 종이 포스터나 홍보 엽서 대신 일회용 스티커 등과 같은 소위 ‘굿즈’라고 부르는 기념품을 만들었다.

이들이 기존의 큐레이토리얼 절차를 몰랐을 리는 없다. 차라리 그것을 안 하기로 결정했다고 봐야 할 텐데, 그렇다면 이들은 스스로를 미술계 공중에게 어떻게 보여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그들의 네트워크, 권시우의 용어로, 대항제도는 글 대신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말하자면 장외집단은 자신을 디자인했다. SNS 타임라인에는 전시의 정체를 표현해주지 않는, 예쁜 포스터가 간단한 전시 정보와 함께 폭발적으로 공유되기 시작했다. 포스터를 디자인한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이 마치 흥행 보증수표처럼 크레디트로 들어갔으며, 공간 구성조차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맡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는 주요 미술관급 전시에서 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SNS 타임라인에 흐르는 전시 리뷰는 비평적 응답이라기보다 ‘재밌었다,’ ‘좋았다’ 같은 단발성 취향 공유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이런 찰나적 ‘알아봐 줌’이야말로 장외집단에겐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많은 신생 논자가 이야기한바, 있는 그대로를 관심 가져주고 지지해달라는 것. 조금이라도 비판적 의견이 개진되면, 그자는 일부 이너서클에게 사이버 조리돌림을 당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게나 이미지가 중요했기에, 그들이 무엇보다 참지 못한 것은 공들여 디자인한,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 집단이 새롭게 보이는 것은 일정 부분 이들이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제도 내에서 경쟁하는 대신 새로운 길을 택한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겨레≫의 노형석 기자는 대안공간 세대의 “이젠 우리가 알아서 뜰거야!”에서 “이젠 우리끼리 터 잡고 놀거야!”로 변화된 양상을 관찰했다.[28] 이는 제도로부터 소외된 젊은 작가가 점점 히키코모리가 되는 현상에 대한 우려 섞인 논평이지만, 순진한 생각이다. 이는 기성세대가 SNS에 익숙하지 않으며, 신세대가 무작정 기성세대와 분리되고 싶어 한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보다 기성세대, 특히 대안공간 세대는 SNS 활용에 있어 신세대와 별다른 정보 격차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장외집단 역시 자신의 네트워크 활동이 이들에게‘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며, 여기서 자신을 어떻게 디자인하고 보여줘야 ‘힙’해 보이는지, 또 존재감을 과시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는 장외집단이 소위 말하는 인터넷 ‘친목질’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시하고 있었고, 그 독자가 세대 내 집단 구성원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형석 역시 세대 내 구성원은 아니지 않는가? 또한 히키코모리가 어떻게 주요 일간지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까?

박권일은 오래된 한 칼럼에서 “주목경쟁”이라는 말을 썼다. 요는, 주목과 관심 그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되어 버린 문화가 사회 현상이 되었다는 것이다.[29] 왜 다른 목적을 위해 주목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주목 자체가 목적이 되었을까? 주목을 상회하는 값어치를 지닌 다른 목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지의 흐름과 평판이 지배하는 미술계 같은 생존 게임판에서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다. 가령 교역소의 <상태 참조>와 심사에 올라온 작업 포트폴리오나 프레젠테이션을 겹쳐 놓고 생각해 보라. 관람과 판단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므로 찰나 안에 진정한 나의 모습을 모두 보여줘야 한다. 흘러가면 끝이다. 그 전에 어떻게든 주목을 끌어내야 한다. 1초의 승부. 이것이 기회특정성을 구성하는 진정한 동기인 셈이다. 또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목경쟁이 순수하게 주목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목경쟁에서 일단 우위를 점하고 나면 2차적 이익도 따라붙는다. 수많은 광고주가 인플루언서에게 목을 매고 수많은 인스타그래머와 유튜버가 광고를 의식하고 사진을 찍고 클립을 만들 듯이, 주목경쟁에는 주목경제라고 부르든 경험경제라고 부르든 간에 매력적인 이미지의 소비를 둘러싼 경제학적 관심이 작동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 주목경쟁에서 장외집단이 진정으로 의식하고 있는 경제적 관심은 이제 인큐베이팅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지원-제도 담론일 것이다. 거의 모든 장외집단의 행사가 지원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다만 이들은 아직 국공립미술관이나 문예위 같은 기성급 제도라기보다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시혜성 제도, 청년 예술가 지원이나 미술시장 지원, 메르스 보조금 같은 비주류 보조금에 의존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뿐이다. 포퓰리즘의 시대에 주목할 만한 것을 보는 관객에는 당연히 제도도 포함된다. 장외집단의 셀프마케팅은 그런 점에서 가히 대성공을 이루었다. 머지않아 이들 중 몇몇은 셀럽이 되어 비주류 지원 영역에서 기성급의 제도 영역으로 진입한다. 강정석의 미술상 수상 같은 예도 있지만,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무래도 서울시립미술관의 결산 전시 ≪서울 바벨≫이다. 미술관은 주지하다시피 미술현장이 역사화되고 역사가 미술현장이 되는 중요한 상징적 문턱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논의에서 더욱 중요해 보이는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여기서 홍태림이 말한 ‘돈보다 좋은 기회’가 무슨 의미인지 다소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사례비를 당장 받지 않더라도 좋은 기회를 얻는다면 미래에 사례비를 요구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 즉 미술관급 작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비하면 ≪서울 바벨≫로 인해 신생공간 담론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미술관급 작가의 아티스트 피와 장외집단의 대항제도는 결국 같은 곳, 지원-제도 담론을 맴돈다. 이는 그 장소를 경유함으로써만 불안정한 예비 작가가 안정적인 작가로 이제서야 생존할 수 있다는, 어떤 면에서는 순진한 믿음이자 절박한 요구였을지도 모른다.

≪굿-즈≫의 생존 게임

신생공간이 장외집단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공유할 수 있는 대항제도로서 기능했다면, 다음으로 이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말하자면 장외시장이다.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시장적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미술관급 작가가 최소한 국공립기관에게 아티스트 피를 주장할 수 있었다면, 장외집단에게 아티스트 피는 아직 가까운 이야기가 아니었고,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장과의 링크 말고 뾰족한 답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티스트 피가 미래를 위한 당위적 운동처럼 시작됐듯이, 장외시장 역시 진지하고 진정한 시장 개척을 의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작품을 유통시킬 수 있는 구조를 가지지 못한 그들이 보기에, 논리적으로 ‘요청’된다는 것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

2015년 장외집단 네트워크가 모여 ≪굿-즈≫를 열었다. 여기엔 작가가 만든 아트상품부터 진지한 작업, 퍼포먼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굿즈 등이 일관성 없이 디스플레이되었는데, ≪굿-즈≫ 기획팀은 이 아이템을 포괄하는 용어로 제시한 ‘굿-즈’를 애초부터 제대로 정의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기획노트를 보면 굿-즈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다만, 젊은 작가라고 부르든 장외집단이라고 부르든, 그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와 이제 갓 시장의 규칙을 학습해 나가는 그들의 태도를 다소 겸손하게 제시하며, 그들 역시 굿-즈가 무엇인지 배워나가고 있음을, 일종의 ‘노력하는 모습’을 강조했다.[30] 하지만 이런 심리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굿-즈≫ 개막 두 달쯤 전에 윤율리가 써서 화제가 된 「하나의 유령이 미술을 배회하고 있다」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이 ≪굿-즈≫ 마니페스토급의 글에서 윤율리의 전략은 일종의 예방접종, 나날이 ≪굿-즈≫에 부과되고 있는 기대심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다른 정치적 목적을 위해 멋대로 신생공간에게 정체성을 부과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어느날 무언가가 우리들 사이에 나타났다고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청년이라는 뜬금없는 자의식이나 신생공간 같은 것이 아니라, 기실 청년을 긴급히 호출해야만 하는 어떤 다급한 요청이나 그에 투사된 또다른 기성의 욕망들이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정정해 말해볼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작은 월셋방에서, 작가들이 아름아름 모여든 작업실에서, 명시된 이름의 어떤 유/무용한 공간들에서, 청년들의 신생공간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늘 꾸준히 존재해 왔다. 다만, 이제 그것은 그들을 ‘신생공간’으로 명명하고자 하는 몇 가지 요구에 의해 이종의 전류처럼 서로를 간섭하게 되었다.[31]

이는 88만원 세대 담론에서도 일찍이 제기된 일종의 당사자주의다. 그렇다면 윤율리가 말하고 싶었던 당사자성이란 무엇일까? 그는 글 말미에 전혀 새롭지 않음에 관해서 말한다. 다시 한 번 인용하자.

우리가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새롭지 않음에 대한 것이다. 이 어려운 숙제는 세대라는 주어를 동시대로, 신생이라는 시선에 담긴 특별함을 보편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다. […] 우리는 왜 하나도 새롭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의 연속인가?-물론 뭐든 새로워보이는 신입생이, 제일 따끈따끈할 때의 졸업생이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라는 사실은 자명한, 약간은 슬픈 진실인 것이다. 흑흑.[32]

윤율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풀자면 이런 것이다. 청년 혹은 신생공간은 너무도 다양해서 하나의 정체성으로 불릴 수 없으며, 원래부터 있었기에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을 향한 호명을 거부함으로써 청년 담론을 “잘 팔리는 상품”으로 소비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장외집단이라고 부른 특정 청년집단 스스로가 청년이라는 따끈따끈한 상품을 마치 보편인 양 독점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결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청년 호명을 향한 윤율리의 불만은 진정으로 PC하다.) 하지만 그런 매너는 윤율리 자신이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어떤 점에서는 실로 음흉한 처리이기도 했다. 이런 선언으로 인해 장외집단은, 보편의 일부인 개별자로서, 윤율리가 그랬듯, 청년 보편을 호명하는 기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보편을 호명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전시의 구성원이 청년 일반으로 늘어나지는 않는다. 이렇게 ≪굿-즈≫의 장외집단은 모호한 정체성 전략 가운데 청년 보편을 안전한 방식으로 견지함으로써 실로 다음 세대의 대표 격으로 부상했다는 것은 굳이 부연하지 않겠다.

≪굿-즈≫에 출품된 모든 굿-즈는 욕망함직함(desirable)을 규준으로 삼았기에, 매출이 얼마였는지 보다 판매/소비 경험 자체가 그들에겐 중요했다. 무엇보다 굿-즈의 가격과 크기, 형태가 일반 작업과 비교해 어포더블한 수준으로 맞춰진다. 모 참여 작가는 팔리지 않는 굿-즈를 전량 폐기처분하리라고 호언장담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굿-즈≫에서 판매 자체가 굿-즈의 존재론적 차원에서도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려주는 사례다. ≪굿-즈≫가 끝난 후 돌아다닌 항간의 소문은 매출이 얼마이며, 누가 누가 와서 누구 작업을 사갔으며, 누구 작업이 다 팔렸으며 하는 얼마간 키아프의 후일담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장외집단에게 이 경험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소비의 총량은 곧 경험의 총량이고 소비가 많았다면 그만큼 많이 주목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동시대 미술계 전체를 놓고 봐도 드물어서, 장외집단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아도, 알아서 미술계의 입이 예술과 상품 사이의 오래된 논쟁을 늘어놓았다. 또한 누군가는 이 세대의 특징을 정의하려고 골머리를 앓았다. 장외집단은 여기에 관해서 침묵을 지키거나 쿨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이후 미술계의 변화된 지형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호명되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굿-즈≫에서 도드라진 몇 작가는 이내 미술제도에 들어갔고, 윤율리는 이러저러한 세미나와 좌담회에 불려 다니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그가 거기서 했을 이야기는 대략 짐작이 가지만, 어쨌거나 그를 불러주는 곳은 항상 호명의 장소였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 정의하지 않고 놔둔 용어 굿-즈는 히스테릭하긴 해도 주목경쟁이라는 마케팅 면에서 최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굿-즈≫ 이후에 발견된 신생공간은 하나의 현상이 되었고 앞서 언급한대로 ≪서울 바벨≫을 기해 제도권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총평은, 장외집단은 결과적으로 윤율리가 그토록 경계했던 청년세대 담론으로 소급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이들은 세대 간 경쟁에서 기회를 잡았다는 것. 그러곤 무엇이 남았나?[33]

내가 보기엔 여전히 제로섬과 불균형이다. 세대 간 갈등으로 촉발된 이 생존 경쟁은 시장이 기적 같이 소생하지 않는 한, 제한된 지원-제도를 여전히 겨냥하고 있으며, <상태참조>나 <청년관>의 임대적 모의실험과 같이 강박적으로 반복되고 또 미끄러지는 프레젠테이션과 선별의 무한 반복을 한층 더 강화시키고 있다. 2010년대 중반의 신세대 담론은 들끓었고 마치 한국의 모든 청년 작가에게 제도적 주목을 요구하는 듯했다, 살펴봤듯이 물론 이는 착시에 불과하다. 이 중에서 누군가는 청년 대표로 불려 나갔지만 대표자가 아닌 누군가는 그럴 기회조차 없이 유령이 되기도 했다. 2015년과 2016년 즈음, 지원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같은 작가의 전시를 대체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또 끊임없이 지원서를 써도 떨어져서 절망하는 작가를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르겠다. 이 중 다수는 작가이기를 포기했다. 누군가는 지원서용 스테이트먼트를 전문가에게 의뢰하고 달달 외운다. 그럼에도 떨어진 경우 작가적 자존심은 땅 밑으로 꺼진다. 이 가시성의 불균형에는 ‘될 놈을 밀어주자’라는 유사 우생학적 선별 논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이 선별 제도가 오늘날 커리어의 동기와 미래를 동시에 심급에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실 ≪굿-즈≫는 예술경영지원센터가 2015년부터 시작한 작가 미술장터 지원 사업에 선정된 지원작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서문에 밝힌 것처럼 “기금에 의탁하지 않고 생존하는 법을 찾아가는 일”을 생각하는 일도 선별된 이후에야 가능하다면, 의문이 드는 것은, 지금 미술현장에서 과연 보조금 밖이란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내가 계속해서 상기시키려고 했듯이, 결국에 미술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과 갈등 구조는 제한된 보조금을 차지하기 위한 개미지옥 게임일까? 만약 그렇다면, 개미지옥에서 승리한 몇몇이 미술관급 작가로 성장해서, 다시 아티스트 피를 요구하게 될까? 그렇다면 거기서 소외된 또 다른 장외집단은 또 다른 ≪굿-즈≫를 만들게 될까?

“스캔들이 사라지고 있다.”[34] 심보선은 이 말을 『그을린 예술』에서 예술상을 거부한다는 비판적 제스처마저 점점 희미해지는 동시대적 상황을 우려하며 썼다. 나는 지금껏 지원제도에 스캔들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왜 미술계의 거의 모든 이는 지원제도를 놓고 서로 경쟁해야 하는가? 왜 이것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가 되었을까? 혹은 당연시 되었을까? 누군가는 이것이 지원제도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능률이 제로에 수렴하는 대다수 예술가의 창작 환경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있으며, 여기서 지원제도는 오히려 바람 앞의 등불 격인 그들의 생존을 위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왜 다른 것도 아닌 유독 예술을 그렇게 지원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예술이 인류 공동체에 기여하는 계산 불가능한 가치를 들먹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을 지지하고 물론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실제로 그런가?

단언컨대 한국에서 창작부터 전시에 이르는 거의 모든 미술 행위 역시 극도로 제한된 내부 관객만을 염두에 둔다. 또한 한국의 미술 지원제도는 관객의 향유보다 작가의 창작 중심으로 짜여 있다. 이는 전문가 중심의 집단 공동체에 대한 낙관적 확신을 기반으로 하는데, 여기서 관객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잘해봤자 모더니스트 계몽주의의 낙수 효과이며, 이를 위해선 무지한 대중과의 차별성을 강조함으로써 제 우위를 정당화하거나 재생산하는 분리주의적 태도도 감수해야만 한다. 미술계가 좋다고 하는 것은 왜 좋은 것인가? 왜냐면 전문가 집단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문가 집단에서 또 다시 전문가를 선별하는 것이 지원제도다. 또 이 선별을 위해서는 더 상위의 전문가를 선별해야 한다. 여기서 심사위원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심사위원이 지원자의 점수를 매기고 선별하는 것만큼의 역방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전문가 피라미드야말로 현재 지원제도를 작동시키는 근거이며, 넓게 봐서는 미술계 전반에 퍼진 인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계몽주의적 엘리트주의가 공동체에 무언가 기여할 거라고 믿는 데 내기를 걸어야 할까?

물론 미술계가 지원제도에 매달리는 이유는 당장의 창작 환경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하지만 지원제도가 근본적으로 전문가적 선별 체계인 이상, 그럼에도 더 이상 지원제도 밖이 없다고 믿는 이상, 누군가의 운 좋은 생존은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고, 이런 것이 실제로 작동하는 현실이 된다. 이 상징적 죽음에는 심사에서 떨어져 낙담하는 내 동료부터 미술의 미 자도 모르는 내 가족, 전시장에서 우물쭈물하는 관객에 이르는 광범위한 타자가 포함될 수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생존할 수 있고 이로 인해 꽤 괜찮은 질의 예술 작품이 생산될 수 있다면, 지원제도로서 이것은 충분한가?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현재의 미술 지원제도가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보다 훨씬 더 중성적인 보호 공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커리어와 성공의 경로를 이미 촘촘하게 설정해 놓은 매트릭스로부터 예술의 위치를 재정위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는 불가능한 일일까? 누군가에게는 이 말이 삶과 예술을 맞바꾸라는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의도는 그 반대다. 제도에게 맡겨진 모두의 삶의 권리를 되찾아 올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예술은 실로 가능성의 장소로 기능할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이쪽에 내기를 걸고 싶다.


1) 미술생산자 모임은 2012년 5.1총파업 퍼레이드에 참가한 현대미술가와 디자이너 중 일부가 조직했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미술하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문제, 미술제도 내의 불합리한 구조에 부딪히는 문제, 국가예술정책의 비정상성 등을 함께 얘기하고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미술생산자모임 웹사이트≫, https://artworkersgathering.wixsite.com/arts/about?fbclid=IwAR108h3vytujbzNMVNdqIxIu8r8w_lVfEtC48pVDl2H6BE5ZUrSHdx2fLRU (접속: 2019년 3월 2일).
2) 미술인생산자모임 편, 「2013 년 12 월 17 일 미생모 첫 공개 토론회 녹취록」, ≪미술인생산자모임 웹사이트≫, p. 10, 12. https://docs.wixstatic.com/ugd/98610d_eec01719d0bf42a1856395495cdebc6e.pdf (접속: 2019년 3월 2일) [본문으로]
3) 홍태림, 「제4회 공장미술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하여」, ≪크리틱-칼≫, 2014년 1월 14일 https://blog.naver.com/redzzongr/221081551222 (접속: 2019년 3월 2일). 이후 홍태림의 인용은 모두 여기. [본문으로]
4) 이후에 그가 쓴 글의 한 문장은 이런 입장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서진석씨가 그만 파산 신청을 통해 대안공간 루프의 운영을 중단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임근준, 「공회전의 한국현대미술계: 윤리 의식의 저하와 을의 분노」, ≪임근준 블로그≫, 2014년 3월 11일, http://chungwoo.egloos.com/4011393 (접속: 2019년 3월 2일); 전체적인 세대론 기획에 관해서는 그의 많은 글 중에서도 다음을 볼 것. 임근준, 「한국현대미술의 당대성과 세대 변환: 1987-2008」, ≪임근준 블로그≫, 2013년 11월 15일, http://chungwoo.egloos.com/3936373 (접근: 2019년 3월 2일); 미술인생산자모임의 토론회에서도 임근준과 유사한 비판이 제기됐는데, 조은비가 대안공간의 고질적인 예산 부족 현상 때문에 현실적으로 급여를 제대로 줄 수 없는 형편에 관해 이야기하자 김화용은 이렇게 말했다. “포기하는 방법이 전시나 프로젝트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저는 더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미술인생산자모임 편, 「2013년 12월 17일 미생모 첫 공개 토론회 녹취록」, p. 22; 유진상 역시 이 사건을 세대 갈등으로 보았다. “기성세대, 나아가 사회 전체가 체계적으로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을 착취하고 이용하고 있다는 좀 더 광범위한 이슈가 제기된 것이다.” 유진상, 「후배 미술인들에게」, ≪월간미술≫, http://monthlyart.com/06-people-info-etc/컬럼-후배-미술인들에게/ (접근: 2019년 3월 2일) [본문으로]
5) 임근준, 「{한겨레21 기고문} 위기의 한국현대미술계와 청년 세대의 새로운 도전」, ≪임근준 블로그≫, 2013년 11월 15일, http://chungwoo.egloos.com/3991889 (접근: 2019년 3월 2일) [본문으로]
6) 위의 글. [본문으로]
7) 88만원은 “비정규직 평균 임금인 119만원”에 “전체 임금과 20대의 임금 비율인 74%를 곱해서” 도출한 숫자다. 우석훈, 박권일, 『88만원 세대』, (레디앙, 2007,) p. 20. [본문으로]
8) 위의 책, pp. 18-22. [본문으로]
9) 위의 책, p. 192. [본문으로]
10) 임근준, 「1988년 이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이들의 세대적 의미」, ≪임근준 블로그≫, 2009년 6월 24일, http://chungwoo.egloos.com/1921086 (접근: 2019년 3월 2일) [본문으로]
11) 임근준이 세대 경쟁을 엘리트 사이의 경쟁으로 보고 있다는 관점은 국내외 대학의 우열을 매기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조기유학생의 변화된 위상을 설명하면서 말하길, “MIT와 스탠포드, UC 버클리 등 3곳까지 포함하면 3,200명을 넘어선다. 올해 서울대 학부 입학생이 3,100여 명 가량이니, 농반진반으로 말하자면, 이제 서울대는 예전의 연세대, 혹은 고려대인 셈이다.” 위의 글, 주석 6. [본문으로]
12) 88만원 세대의 보수 우파 버전의 대표적인 예는 변희재의 실크세대론이다. 다음 글을 참고할 것. 변희재, 「실크세대론과 88만원세대론의 소통을 위하여」, ≪조선일보≫, 2009년 1월 27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26/2009012600182.html (접근: 2019년 3월 2일). [본문으로]
13) 임근준, 「대학 졸업을 앞둔 예비 작가에게」, ≪임근준 블로그≫, 2010년 2월 10일, http://chungwoo.egloos.com/2651702 (접근: 2019년 3월 2일). [본문으로]
14) 우석훈과 박권일은 386세대가 “가슴 속에 ‘혁명’이라는 단어를 묻고” 살아가며, “경쟁이라는 단어를 생경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경쟁 대신 연대와 협력 같은 것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이 20대에 생각했던 사회적 꿈이 일종의 변혁 프로그램이 되지 못하고 망가진 것이 지금의 20대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그들끼리 단결하고 연대를 공고히 만들어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위의 책, p. 190. 그런 면에서 공장미술제가 386세대 내 결속을 공고히 하거나 이권을 배타적으로 점유하려고 했다고 보기는 힘들며, 그 규모로 봤을 때 세대 내 경쟁을 부추겼다고 보기도 무리가 있다. [본문으로]
15) 유진상, 「후배 미술인들에게」. [본문으로]
16) 권시우, 「동‘세대’ 미술, (괄호)로부터의 호명」, ≪집단오찬≫, 2015년 3월 26일, https://jipdanochan.com/43?category=590139 (접근: 2019년 3월 2일). 이후 권시우의 인용은 모두 여기. [본문으로]
17) “명주잠자릿과의 애벌레를 ‘개미귀신’이라 부르는데, 이 개미귀신은 모래땅에 개미지옥을 파놓고 숨어 있다가 그곳에 미끄러진 개미 등의 작은 곤충을 잡아먹는다. 패자부활전이라면 개미지옥에 떨어졌다고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패자들끼리 게임은 일단 개미지옥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일종의 자리 잡기 싸움에 가깝다. 이는 개미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누구를 밀어 넣느냐, 즉 ‘누가 가장 먼저 잡아먹힐지’를 결정하는 문제다. […]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면 눈치 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서로 싸우는 대신 협력해서 개미귀신과 맞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미지옥 내부에서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모두 목숨을 걸고 개미귀신과 싸워야 겨우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몇몇이 방관할 경우 싸우는 것은 명을 재촉하는 일일 뿐이다. 결국, 다들 목숨을 걸고 싸우는 대신 조금 늦게 잡아먹히길 원하게 된다.” 우석훈, p. 198. [본문으로]
18) 「〈안녕, 2014, 2015 안녕〉 송년좌담회 미공개 녹취록」, pp. 34-35. [본문으로]
19) 홍태림은 여기서 전시의 하향평준화 문제를 거론한다. 이는 전시와 참여 작업 모두를 아우르는 말로, 곧 전시가 작업의 질적 상태까지 결정한다는 주장처럼 보인다. 이는 큐레이팅의 미적 권력을 작업보다 우위에 놓는 것으로, 임근준이 (젊은) 큐레이터를 (젊은) 작가를 대표하는 지위에 놓는 것과 동일한 시각을 보인다. [본문으로]
20) 유진상, 「후배 미술인들에게」. [본문으로]
21) 임근준, 「공회전의 한국현대미술계: 윤리 의식의 저하와 을의 분노」, [본문으로]
22) 임근준, 「공회전의 한국미술계」. [본문으로]
23) 바이홍, 「대안-공간인가?」, 『메타유니버스』, 윤율리 편, (미디어버스, 2015,) p. 153. [본문으로]
24) 위의 책, pp. 154-155. [본문으로]
25) 위의 책, p. 156. [본문으로]
26) 임근준은 「{한겨레21 기고문} 위기의 한국현대미술계와 청년 세대의 새로운 도전」에서 현시원의 시청각과 함영준의 커먼센터를 새로운 세대의 대표자로 점찍고 있다. [본문으로]
27) 우석훈 외 1인, 『88만원 세대』, p. 20. [본문으로]
28) 노형석, 「이젠 우리가 알아서 뜰거야!」, ≪월간 미술≫, http://monthlyart.com/01-special-feature/special-feature-광복-70주년-한국미술-70년-5/ (접근: 2019년 3월 2일). [본문으로]
29) 박권일, 「주목경쟁의 시대」, ≪한겨레≫, 2014년 10월 13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9525.html (접근: 2019년 3월 2일). [본문으로]
30) 굿-즈 기획팀, 「기획노트」, ≪굿즈 웹사이트≫, http://goods2015.com/text_01.html [본문으로]
31) 윤율리, 「하나의 유령이 미술을 배회하고 있다」, ≪반지하 웹사이트≫, 2015년 8월 3일, http://vanziha.tumblr.com/post/125734241117/하나의-유령이-미술을-배회하고-있다-윤율리-신생공간에-대한-어떤-소문이 (접근: 2019년 3월 2일) [본문으로]
32) 위의 글. [본문으로]
33) 이 결과는 기묘하게 대안공간이 겪었던 과정을 답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안공간은 정부보조금으로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새로운 작가를 가치화하고 시장에 유통시키는 첨병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실로 신자유주의적 정부의 에이전트였을지도 모른다. 신생공간과 ≪굿-즈≫가 혹시 그것의 새로운 (모의적인) 판본은 아니었을까? [본문으로]
34) 심보선, 『그을린 예술』, (민음사, 2013), p. 182. [본문으로]


2018. 12.

2024년 1월 31일 수요일

이 블로그의 용도

이 블로그는 내가 지금까지 쓴 글 중 공식지면에 게재된 글을 모으기 위해 만들었다. 근데 그 글들이 잘 모아지지 않았다. 지금부턴 이 블로그에 차곡차곡 모을 예정이다. 

2015년 6월 25일 목요일

공공미술의 종언

한 때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여겨졌던 ‘공공성'과 ‘공공미술’이라는 미술 용어를 요즘 진보적인 미술 담론 안에서 들어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오늘날, 공공미술은 지나간 유행에 불과하다. 한 때 집단적으로 부과됐던 ‘공공성’에 관한 낭만주의적 환상이 불러일으킨 결과가—어쩌면 두 번째 새마을운동이라고 해도 무방할—미학적 건설주의의 폐허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규모의 공공미술 예산이 해마다 마련되고 있으며, 전국 각양각색의 예술가들이 모이고 있으며, 그 결과 공공미술 사업은 여전히 마치 유령처럼 예술계와 지자체 사이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여기에 관계된 예술가 중 어떤 누구도 공공미술에서 예술의 미래를 점치는 사람은 없다. 한편, 어떤 이들은 다른 종류의 미래를 공공미술에서 본다—예를 들어 정치의 미래, 복지의 미래, 행정의 미래. 따라서 오늘날 공공미술에는 어떤 냉소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행정의 권위에 도전한 “행정의 미학”에 대한, 행정의 위대한 복수, 즉 (말하자면 권미원이 지적한) “미학의 행정”에 대한 미술가들의 패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1]

“공공미술”은 왜 실패했을까?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엄밀한 공공성 개념의 부재를 문제점으로 지적해왔다. 하지만 그런 반성은 반쯤은 짓궂은 농담처럼 들린다. 미술이 이데올로기를 부연 설명하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기도 한 이상, 공공미술이 지금까지 생산되어왔다는 것은 곧 공공성에 대한 입장을 끊임없이 표명해왔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미술을 둘러싼 담론은 여전히 ‘공공성’ 개념에 대한 어떤 갈증으로 허덕이고 있다. 즉, 여전히 공공성 개념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미술이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아르코에서 2008년에 출간된 <공공성>이라는 선집이 그러한데, 철학, 행정학, 법학, 미학 등에서 규정하는 공공성의 의미를 제각각 규정하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시도다. 결론은? 합의될 수 없는 다양한 개념의 층위를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공공미술/공공성 개념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기 전에 최소한, 오늘날 한국에서, 공공미술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냉정하게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공공미술을 잘 모르고 시작했지만, “공공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종언 만큼은 최소한 확실하게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이쯤에서 내가 공공미술이라고 부르는 미술의 형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데, 권미원이 잘 정리했듯이, 첫째, 공공장소에 설치한 모더니즘 조각, 둘째, 건축-환경과 공모하는 공공디자인, 그리고 셋째, (뉴장르-공공미술과 그 지평으로 읽힐 수 있는) 행동주의 공공미술이다. 첫째의 경우, 소수자에게만 허락됐던 웰-메이드 예술의 향수적 측면을 대중 차원으로 확대시킨다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둘째의 경우, 첫째가 문화 소외자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서, 기능주의 미술로 전환하면서 이뤄졌다. 셋째의 경우, 문화 소외자의 참여 자체를 미술의 핵심으로 내세우며 그 전의 실패를 만회하려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미국의 공공미술 지원 제도의 변천사를 선형적으로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한국에서는 공공미술의 발전사로 오인되고 있다. 특히 마지막의 행동주의 미술은 (폐허를 비교적 적게 남긴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에서 가장 진일보한 공공미술의 버전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커뮤니티아트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행동주의 공공미술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과정을 작업의 몸통 삼아, 타자를 예술에 참여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꽤 낭만주의적인 투사로 보이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문제점을 주로 지적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예술가의 자리’에 관한 문제다. 이 문제는 발터 벤야민의 글 <생산자로서의 작가>에서 유사하게 지적된 적이 있다. 벤야민은 이 글에서 많은 부분을 “정신적 엘리트”로서의 좌파 부르주아 지식인-예술가를 비판하는 데 할애한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런 예술가는 “올바른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혁명적 노동자와 연대해서 부르주아 문화의 생산수단을 변혁시키는 것에 관심이 없다. 즉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혁명적 주체를 인정하지만, 현실의 계급투쟁이나 사회혁명에 진실로 냉소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벤야민에 의하면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옆에서’ 자신의 설 자리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2] 그러나 그것은 도대체 무슨 자리인가?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후원자의 자리, 즉 벤야민식으로 말하자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자리”다.”[3]

이데올로기적인 후원자가 종국에 실패하는 이유는, 그 자리가 확고하면 할 수록 노동자가 소외될 뿐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재현을 통해서 그 간극을 확실하게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4] 이것이 할 포스터가 “민족지학자로서의 미술가"에서 지적하는 바로, 오늘날 타자를 진리의 장소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가진 미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다. 예컨대 많은 커뮤니티아트는 사라져가는 지역 공동체의 문화를 상징계에 복귀시킴으로써 지배적인 문화를 비판하려 한다. 하지만 이렇게 미술에서 소환시킨 지역적 타자는 진정한 타자라기보다, 어쩌면 예술가-지식인 (혹은 그보다 상위의 주체가) 스스로를 타자에 투사한 결과, 오히려 ‘안전하게’ 재현된—말하자면 포르노그라피에 가까운—타자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은 “타자를 ‘자기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낡은 방식, 즉 타자를 여전히 자아를 돋보이게 하는 금박 장식쯤으로 남겨두는 (그 과정에서 이 자아가 아무리 곤란을 겪는다 해도) 방식으로 자아를 ‘타자화’할 것이다.”[5] 그 결과 지배적인 문화의 안티테제로서 ‘외부의 공포’로 남았어야 할 타자의 문화는, 박물관 유리에 잘 포장되어 질서정연하게 디스플레이 될는지도 모른다.

벤야민이 지적했던 이데올로기적 후원자가 생략한 생산수단의 변혁의 문제는 다음의 문제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자본의 문제다. 공공미술가가 그들의 작업에서 자본의 존재를 괄호치려는 경향이 있지만, 대부분의 공공미술은, 심지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프로젝트에 불과하더라도, 문예진흥기금과 같은 국가 규모의 지원금 없이는 실현/유지되기 힘들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텐데, 타자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후원하는 자가 공공미술가라면, 그 공공미술가를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정부와 지자체다. 그리고 이때 지원금은 보통 정치적/행정적 대의, 즉 “소외지역 생활환경 개선”과 같은 목적 하에 출연된다. (공공미술 추진위원회의 <아트인시티>,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안양시의 <APAP> 등을 떠올려 보라.) 따라서 지원금을 통해 추진되는 공공미술 ‘사업’에는 근본적인 차원의 어떤 정치경제학적 개입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정치경제학적 개입에 대해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김장언의 글 <상징과 소통, 공공미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에서 아주 상세히 잘 설명하고 있다. 김장언은 이 글에서 2000년대 중반 미술계의 핵심 키워드였던 공공미술이 사실은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한국사회 속에서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호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시장본위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근대적 국민-국가의 역할은 최소한으로 축소되는데, 이는 곧 사회적 갈등 요소를 통합해 줄 국가 차원의 사회적 안전장치—즉 공공성—가 모두 해제됨을 뜻한다. 이때, 신자유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국민국가는 어떻게 사회재통합을 기획할 것인가? 김장언은 “협치(governence)와 문화”라고 주장한다.[6]

공공미술은 이런 상황에서 호명된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다소 유연하게 작동하는 사회통합 장치로서 말이다. 이때 공공미술은 새롭게 고안된 복지모델이자,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생겨난 다양한 사회 경제적 문제를 상상적으로 해결하는 문화(산업) 모델이기도 하다. 공공미술이 전개되자, 전국의 달동네가 예술마을-기업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가? 공공미술의 근본적인 문제가 신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된다면, 우리는 분명히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공공미술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하의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의 예를 보자.

한때 동피랑 벽화마을은 공공미술의 모범 사례로 자랑스럽게 손꼽혔던 곳이다. 철거위기에 놓였던 달동네 동피랑 마을은, 대규모의 벽화작업을 통해 ‘벽화마을'로 거듭났으며, 덕분에 관광객이 몰려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동피랑 마을은 2013년 3월 생활협동조합 '동피랑 사람들'을 설립한 데 이어 마을기업으로 지정받았다.) 하지만 이 “한국의 몽마르뜨”가 ‘경쟁력’을 갖춰야 할 운명에 처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후 예술마을이 전국 규모로 난립하자 더이상 동피랑은 매력적인 관광지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업화한 마을은 벽화 비엔날레와 같은 규모의 행사를 기획/조성하여 장소마케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한편 그와 동시에 증가한 관광 수요는 동피랑을 더이상 주민의 생활 터전으로 남아있을 수 없도록 했다. 한 보도에 의하면 올해 초 벌써 5가구가 이사를 갔으며, 외지인 1명이 이 집을 모두 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 가운데 1곳은 커피숍으로 바뀌어 동피랑 사람들이 운영하는 점포보다 수입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7] 이런 현상을 일각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도심부촌화)이라고 부른다.

긴 예를 통해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어느 정도 드러난 것 같다. 동피랑 벽화마을의 문화전략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봉합하기 위한 정책적 전술전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달동네를 부촌화시킴에 따라 소외자를 양산시켰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선봉장 역할을 동시에 맡았다. 동피랑의 예에서 문화를 통한 지역 재생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동피랑의 공공미술이 간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동피랑의 문화적 부흥운동은 어쩌면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을 문화에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내가 보기에 동피랑의 문제는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공공미술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심지어 예술가가 지자체의 요구에 반할 경우에조차 그렇다. 많은 “진보적인” 공공미술가는 지자체와 행정가의 문화적 무지를 비난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창조해 놓은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지에 관해서는 행정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혹은 더욱 철저하게 위악적으로 이들과 공모한다. 공공미술가의 아킬레스건은 자본이다. 공공미술은 전지구적 자본에 함구할 때만 작동할 수 있는 문화논리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내가 보기에 공공적이지도, 미술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제도적이고, 행정적이다.) 하지만 공공미술은 여전히 정부와 지자체의 통합수단으로 막대한 규모의 예산이 투여되고 있고, 소외지역에는 유지관리 조차 되지 않은 볼품 없는 문화적 폐허가 즐비하게 양산되고 있다. 우리에게 여전히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되물어볼 수 있는 여유가 남아 있을까? 만약 그럴 여력이 있다면, 공공미술의 실패를 인정하고, 그것에 제동을 거는 일에 온 힘을 쏟는 것은 어떠한가? 온 국토를 헤집고 다니고 있는 이 좀비들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하기 보다는, 시름시름 앓고 있는 미술의 상황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어떤가? 14.12.09

* 산업예비군 도록에 기고됐음.
(짧은 보충은 여기로: http://be-writing.blogspot.kr/2015/11/blog-post_22.html)
________________

[1]권미원, 『장소특정적 미술』, 김인규 외 2인 역, 현실문화사, 2013년, 81쪽.

[2]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반성완 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5년, 261쪽.

[3] 발터 벤야민, 위의 책, 같은 쪽.

[4] 할 포스터, 「민족지학자로서의 미술가」,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출판부, 2010년, 274쪽

[5] 할 포스터, 위의 책, 279쪽

[6] 김장언, 「상징과 소통 : 지금 한국에서 공공미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Visual』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 2010년 7호, 90쪽.

[7]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의 위기」, 『연합뉴스』, 2014년 4월 14일 17시 48분,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4/04/14/0907000000AKR20140414161600052.HTML (검색일: 2014년 12월 9일)

2015년 6월 19일 금요일

검은 그림 이야기

배윤환, 기름 붙일 곳을 찾는 사나이, 2014. 종이에 목탄, 오일파스텔, 가변설치

배윤환, 기름 붙일 곳을 찾는 사나이, 2014. 종이에 목탄, 오일파스텔, 가변설치


지금부터 내가 시작하려는 토막난 이야기는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 중 일부분이다. 그 누군가 또한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하며, 그 누군가는 아마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테니, 이 이야기의 기원은 아마, 18세기 정도로 어림짐작 할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부터 내가 말할 수 밖에 없는(해야만 하는) 이야기에 대해 여러분이 어느 정도 흥미를 느껴하지 않을까 짐작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기대만큼 흥미롭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서도), 외려 그보다 나는 지금, 그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싶다. 이 이야기에는 무언가 대단히 악의적인 어떤 것이 깃들어 있으며,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자는 하나 같이 불행해져 갔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가 토막난 이야기라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일 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에 대해서는 보증된 바가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 * *

애써서 찾기 힘든, 존재조차 희미한 먼 지방 어딘가에 작은 별장이 하나 지어졌다. 높은 언덕에 지어진, 이층짜리 전원주택이었다. 언젠가부터 이 별장에는 사교를 믿는 위대한 술사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술사는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악령을 불러내고 있다고 한다. 그 술사는 동물의 사체로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데, 그 그림은 칠흑같이 어두우며, 그 그림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고 한다. 이 술사는 한 달에 한 번 물감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밖을 나선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종종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이 실종되곤 하는데, 번번이 그 흉수로 이 술사가 지목됐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이 별장 근방을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이런 풍문은 진실처럼 굳게 믿어지고 있다.

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낡은 별장은 명망 있는 궁정화가가 지었다고 한다. 그 화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싸움질과 칼질을 일삼았으며, 수많은 연애담을 만들었을 만큼 성급한 성격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찍이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할 정도로 천부적인 화가의 재능을 타고나 유명세를 떨쳤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의 회화의 뛰어난 소묘와 찬란하게 빛나는 색감은 많은 왕실과 귀족들이 사랑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는 대형 제단화 작업에 다수 참여했으며,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무수히 도맡아 그렸다고 한다. 그 명망 있는 궁정화가는 큰 병을 앓은 후,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 * *

그가 건강 회복을 위해 지방으로 가도 좋다고 궁정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그에게 덮친 병마는, 그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 당시 그가 보낸 편지를 보면, 그 병에 관한 일화가 종종 언급되고 있는데, 그 병은 머릿속에서 야기되는 병이라고 한다. 후일 그의 회고에 따르면 머릿속에서 굉장한 소음이 들렸다고 한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 소리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그는 꽤나 심한 신경증에 시달리게 됐다. 그 소리는 교묘한 울림이었으며, 깊고 진한 무엇이었다. 그것의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부터 그는 그것이 (인지조차 하지 못한) 어떤 사소한 잘못으로 인해 걸린 일종의 저주이며, 영원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신과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그 소리를 듣기 시작할 때쯤이었을 것이다. 그 내부의 소리는 외부의 소리를 점점 침식하더니, 그는 곧 바깥으로부터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남들은 그것을 귀머거리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면 여전히 어떤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깊고 넓은 고요의 한 복판에서 풍부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조차 한 귀머거리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점도 함께 언급해야만 하겠다. 거듭 확실한 것은, 병이 가라앉았을 때, 그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질병앓이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말았다. 귀머거리가 되면서 인간사회와의 접촉이 제한돼버리자, 환상적인 것에 대한 그의 경향이 짙어졌고, 극적이고 몽상적인 것에 대한 집념도 더욱 강해졌다. 병으로 인해 산란해진 그의 상상과 망상이 점점 그를 옭아맸다.


* * *

벽난로의 온기는 졸음을 부른다. 분명히 무언가를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눈꺼풀이 희미하게 덮이고 있을 찰나, 바닥에 세워 놓은 물감통 뒤에서 거뭇한 형상이 빠르게 지나갔다. 분명히 그것은 쥐다. 검은 쥐! 그는 평소에 쥐를 특별히 혐오하고 있었는데 그 감정은, 격렬한 분노의 감정과도 더욱 가까웠다. 작고 미약하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것에 대한 그 어떤, 무척이나 신경질적인 감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감을 양 손으로 쓸어버렸다. 놀란 검은 쥐는 (물론 그는 듣지 못했겠지만) 찍찍 소리를 내며 테이블 밑으로 뛰었으며 이내 사라졌다. 안달이 난 그는 양초에 불을 붙인 후 몽둥이로 쓸 빗자루 들고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그의 검고 붉은 눈은 그 작고 검은 쥐의 형상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포착하려 했으나, 검은 그림자는 용의주도하게 그 시선으로부터 미끄러져 갔다.

검은 쥐는 여전히 찍찍 소리를 내며 작업실 안을 종횡무진 뛰어 다녔다. 순간 그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는데, 그 검은 쥐가 물컹하고 진득한 무엇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검은 쥐가 뛸 때마다 기름 같은 철벅철벅한 무언가가 흘러 내렸고, 그럴수록 작업실의 물감은 하나 둘씩 검게 변해갔다. 나는 조급해졌다. 그 칠흑 같은 검은 색 위에 그 어떤 색이 군림할 수 있으랴! 그는 조심히 붓을 들고 기회를 노렸다. 그 검은 쥐는 바닥에 흘러내리는 물감을 탐욕스럽게 핥아 먹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검은 쥐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것을 향해 붓을 냅다 푹 찔렀다.


* * *

그는 거대한 불을 보고 있었다. 그 불길이 어찌나 맹렬하던지, 순식간에 집 몇 채가 무너졌고, 온 천지가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문득 그는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거대한 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그것을 그리고 싶어졌다. 거대한 불은 거대한 연기다. 거대한 연기는 거대한 어둠이다. 사람들이 연기와 화염 속에서 기절한 남자와 여자를 구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뭉개졌다. 어둠이 그들의 눈알과, 머리통과, 팔과, 다리를, 파먹어 들어갔다. 그는 어둠을, 그 집합적인 형태를, 그 검은색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재난을 피하고자 허둥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화면의 전경 한 쪽 구석에 있고, 그리고 커다란 불길이 반사된 것과 같은 색채를 띤 검은 구름이 그것을 감싸고 있다. 배경을 나타내는 어떤 구체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도망치려 하거나 생존자를 구하려고 하는 무리진 사람들 위로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빛, 즉 형태 없는 연기에 싸인 강렬한 빛만이 있을 뿐이다.>


* * *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바닥에 앉아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양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식사는커녕, 심지어 화장실도 가지 않고 수 시간 동안 그러고 있는 것이 일이었다. (종종 호사가들이 호들갑을 떨기를, 그 모습이 마치 살덩이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옆에는 이젤 위에 올려진 텅 빈 캔버스가 그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사실, 텅 빈 캔버스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한 때 명망 있는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텅 빈 캔버스 앞에서 참을 수 없이 미약하고 하등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그 캔버스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텅 빈 캔버스. 그 캔버스는 원래 앨버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10여 년 전에 마련한 것이었다.

앨버는 명망 있는 공작부인으로, 타고난 미모와 개성 때문에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았으며, 심지어 여왕으로부터도 시샘을 받던 여자였다. 그와 앨버가 밀월 관계였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앨버 부인은 예술 밖에 알지 못했던 고귀한 아카데미의 수장을 존경심과 애정으로 대했다. 앨버 부인은 그의 예술을 사랑했고, 모델 역할을 기꺼이 청하기도 했다. 그와 그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앨버 부인은 공작의 아내였다.

하지만 아깝게도 그녀는 아름다움을 채 꽃피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지독한 열병에 걸려서 수일 만에 유명했다는 사인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지만, 그 외에도 잡스럽고 불쾌한 소문과 의혹들 또한 많이 존재한다는 점도 함께 언급되어야만 하겠다.


* * *

그는 캔버스를 천천히 응시하고자 했다. 원래 10년 전에 그려졌어야만 하는 텅 빈 캔버스였다. 몸이 파르르 떨려왔고, 어쩐지 슬픈 감정이 들었다. 그 텅 빈 캔버스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 텅 빈 캔버스는 문득, 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칠흑보다 검은 쥐 말이다. 그는 마치 찢어발기려는 듯한 기세로, 고양이 마냥 손톱을 세워 캔버스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는 어둠과 한 덩어리로 뒤엉키게 되었는데, 남들이 봤다면 그가 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을 테다. 그와 상관 없이 어둠은 점점 짙어져갔다. 그는 어둠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상냥하게 말을 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손은 어둠을 만지려고 했다. 그는 어둠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곰과 부엉이와 개와 말이 그의 주변을 빙빙 날며 이 광경을 찬양했다.


* * *

그는 붓을 들고 있었다. 검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두껍고도 큰 붓이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초점 없는 눈으로 닥치는 대로, 손에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빠른 속도로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능숙한 나머지 그의 손이 붓이나 몽둥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의 붓은 점점 닳아갔다. 그의 손은 점점 닳아갔다. 그의 몸은 점점 닳아갔다. 텅 빈 캔버스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점점 소진되어가고 있었다.


* * *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시골 마을의 음습한 작은 별장은 대단히 심각한 화재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화재를 말할 것 같으면, 사흘 동안 불이 타올랐고, 사흘 동안 내린 비에 의해 가까스로 꺼졌으며,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그 열기 때문에 사흘 동안 옷을 벗고 살았다느니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소문에 의하면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 검은 페인팅이 하나 발견됐는데, 인근 마을의 농부가 땔감이나 하려고 가져다 놓은 것을 고귀하신 어떤 분께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사갔다고 전해진다. (14.1.14)

* 배윤환 <기름 붙일 곳을 찾는 사나이> 서문으로 쓰였음. 

홍범의 <방문>에 관한 노트

홍범, 방문, 2015, 티비, 애니메이션, 설치


[브루통과 초현실주의자들은] 철지난 것—초기 철골 구조물, 초기 공장 건물, 초기 사진, 사라져가는 물건, 그랜드 피아노, 5년 전에 유행했던 드레스, 한 때 최첨단 유행을 대표했지만 이제는 유행에 뒤떨어져버린 레스토랑과 같은 것—에서 발산되는 혁명적 에너지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 이런 선지자나 예언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어떻게 빈곤—사회적 빈곤뿐만 아니라 건축의 빈곤, 실내 인테리어의 빈곤, 복종하고 복종시키는 물건들—이 갑자기 혁명적 허무주의로 변화할 수 있는지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1] 발터 벤야민, 초현실주의 (1929)

홍범은 <방문Visiting> (2015)에서 8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세곡동 가옥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는 기억 속의 방들을 심리적 성격이 강한 3D 애니메이션으로 모델링한 뒤, 그 결과를 수 개의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를 사용해 상영했다. 일점투시로 깔끔하게 구획된 모노톤의 방들은 고요하고 명상적이며 심지어 적막하다. 다만, 실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요소들이 미묘하게 작동하면서 그 공간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그 움직임은 마치 잘 만든 기계장치처럼 규칙적이고, 또 조용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작가가 유년 시절의 집을 다시 방문하는 느낌으로 제작했다고 하는 이 작업은 불특정하고 오래된 심상으로 보는 자를 인도한다. 이런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1차적인 요인은 아무래도 오래된 텔레비전 수상기와 그것이 만들어내고 있는 미세한 화면의 노이즈일 테다. 대화면의 LCD패널을 통해 안정적이고 선명하게 영상을 뿌려주는 오늘날의 최신식 텔레비전과 비교했을 때, 이런 소형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확연히 다른 기계라고 해도 좋을만큼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 오래된 물건은 한 때는, 80년대 쯤엔 여전히 어른들과 아이들의 주목을 끌었던 진기하고 새로운 물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때 당당하고 화려했던 영웅이 조락한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지금은 상실해버린 소중했던 것을 다시 상기하는 한편, 현재 마저도 멜랑콜리하게 보게 될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의 특별한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이런 종류의 멜랑콜리는 때로는 현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혁명적 허무주의가 되기도 한다. 발터 벤야민은 <파리—19세기의 수도>에서 19세기에 만들어진 철지난 상품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부르주아지의 폐허들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것은 발자크였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처음으로 이 폐허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생산력의 발전은 19세기의 소망들을, 심지어 그것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기념비들이 채 붕괴되기도 전에 벌써 산산조각 내버렸다. 16세기에 과학이 철학에서 해방된 것처럼 19세기에는 이러한 발전이 조형 형식들을 예술에서 해방시켜주었다. […] 이러한 생산물은 모두 이제 막 상품으로 시장에 들어갈 참이었다. 하지만 아직 문턱에서 주저하고 있다. 아케이드와 실내, 박람회장과 파노라마는 이러한 주저의 시대의 산물이다. 꿈의 세계의 잔재인 것이다. […] 상품 경제의 동요와 함께 우리는 부르주아지가 세운 기념비들이 실제로 붕괴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들을 폐허로 간파하기 시작한다.[2] 

요컨대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한 오래된 물건이 유아기의 자본주의의 실체를 폭로한다고 보았다. 부르주아가 그토록 아꼈던, 그 영원할 것 같았던 물건이 채 낡기도 전에 오래되어 사라져가는 모습은 부르주아의 문화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또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런 한에서 초현실주의자의 오래된 물건은 그 음울한 기운으로 선진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진보성을 경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이제는 망각해버린 과거의 유토피아적 힘을 그 사물 속에서 불러 내어, 다른 실천적 방식으로 변용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홍범의 텔레비전 오브제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2011)를 쓴 박해천에 따르면, 한국에서 텔레비전 수상기는 60년대 이후 80년대까지도 텔레비전은 “과시적 오브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후한 가정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원목 재질의 가구 느낌으로 텔레비전은 디자인 되어 각종 장식이나 종종 문까지 달려 시판되었다.[3] 텔레비전 디자인은 실내 구조와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화했지만, 거기에 부과된 ‘실내 분위기와 어울릴 것’이란 지상 명령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 이유는 텔레비전은 중산층의 상징이자, 가정의 여유와 안락함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 홍범은 텔레비전, 냉장고 등 남들 집에도 다 있는 평범한 것이라 하며, 자신의 집을 평범한 중산층 가정으로 묘사했다. 만약 그렇다면, 홍범의 가정은 박해천이 주장했던 80년대 인테리어의 문법의 자장 속에 있었다고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런 한 홍범의 텔레비전은 80년대 중산층의 오래된 꿈이자 미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이 분석한 초현실주의 오브제처럼, <방문>에서 소환시킨 그 오래된 텔레비전는 80년대 중산층의 꿈의 기념비이자 폐허일 수 있다. 그 꿈은 한 때 절실했지만 "채 붕괴되기도 전에 벌써 산산조각"나서 그 오래된 텔레비전 속에 암호화 된 것이다. <방문>은 거기에 암호화된 잡다한 기억을 되살린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생략하고 망각했던 80년대 유토피아의 진실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것의 덧없음에 대해 경고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텔레비전 모니터가 반영하고 있는 오래된 기억의 방의 이미지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홍범의 가족은 원래 잠실의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중산층 가정으로, 세곡동 단지 개발에 발 맞추어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이것은 70년대 중후반쯤부터 강남권에서 서서히 과열되기 시작한 아파트 투기 열풍과는 어쩌면 상반되는 행보로, 여기에는 사각형으로 이뤄진 비좁은 땅에서의 옹졸한 ‘모던 라이프’ 에서부터 가족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어느 정도 강하게 포함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덕에 홍범은 유년 시절을 자연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작가는 집이 마치 보물창고와 같았다고 회상했다. 몇 개의 종류의 방을 보여주는 영상 시리즈는 작가의 소중한 기억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종의 스스로를 위한 환등상이다. 

그러니까 집이라는 사적 공간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유년시절의 작가를 지켜준 그 친밀함의 요체이며, 그 속에는 그 시절의 모든 근원적인 꿈과 낭만이 포개져 있다.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키에르케고르가 환경에 녹아있는 기억의 중요성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이미지의 틀을 이루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이것이 기억 속에,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혼 전체에 가장 강하고 깊이 새겨져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나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 작은 방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로드레리아를 떠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4] 이 인용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주관적으로 파악된 공간의 기억을 생생하고 진실된 것으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어서 벤야민은 같은 책에서 키에르케고르의 글에 대한 아도르노의 주석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외적인 역사가 내적인 역사에서는 반영된 모습으로 존재하듯이 실내에서 공간은 가상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단순히 반영되거나 반영하는 주관 내적인 현실은 모두 가상이라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내의 형상들에서는 공간적인 것이 가상이 된다는 것도 꽤뚫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물들이 그의 오류를 폭로한다. […] 실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은 단순한 장식에 불과하다 […] 자아는 상품과 상품들의 역사적 본질에 의해 바로 자기 영역에서 압도당한다. 상품의 가상적 성격은 역사적, 경제적으로 사물과 사용가치의 소외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 소외된 사물에서는 소외 그 자체가 바로 표현으로 모습을 바꾼다. […] 그리하여 말없는 사물이 ‘상징'으로서 말한다. 주거 공간에 사물을 정리하는 것을 배치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가상인 사물들이 여기에서는 변하지 않는 자연의 가상으로 배치된다. 유기적인 생명으로서의 꽃, 먼 곳에 대한 동경의 고향인 오리엔트, 영원함 그 자체를 형상하는 바다의 모습 등 고풍스러운 형상이 실내에 떠오른다. 사물들이 각자의 역사적 순간에 의해 운명처럼 짊어지게 되는 가상이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5]

요컨대 길게 인용한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실내 공간이나 그것을 장식하고 있는 물건에 실존성을 동여매려는 키에르케고르의 시도는 이미 소외된 사물에 의해 가상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내는 환등상으로서, 부르주아 개인의 사생활을 노동과 같은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가상의) 방벽, 혹은 도피처로 이해됐다. 사람들은 거기서, 가상의 사물을 통해, 가상의 자연을 구현했다. 그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자아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벤야민은 <파리—19세기의 수도>에서 루이-필립 치세에서 등장한 최초의 부르주아의 실내 공간이 외부 공간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는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개인에게 있어 최초로 생활 공간이 노동 장소와 대립된다. 이제 생활 실내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계산대는 실내의 하나의 보완물이 지나지 않게 된다. 계산대에 앉아 세상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개인은 실내에 넘쳐나는 여러가지 환상에 편안하게 해줄 것을 요구한다. [...] 이로부터 환(등)상에 빠진 실내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에게는 우주를 대변하게 된다. 그는 이 실내에 멀리 있는 곳과 과거를 수집해 들인다. 그의 거실은 세계 극장의 박스석이다.[6]

하지만 실내라는 방벽은 실제로 외부세계의 방벽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할 포스터는 여기에 대해 정확히 지적했다. 그는 기디온을 참조하며, 당시 산업 생산품의 폭발적 증가와 “상징의 가치 저하”는 부르주아 실내공간이 안전한 장소로 남지 못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산업 생산품의 진보는 부르주아의 귀족적 수집품을 “키치화”했으며, “그 물건들은 마침내 소외의 과정을 겪으며 ‘소망과 불안’의 암호가 되어버렸다.”[6] 포스터는 이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부르주아 주체의 심리적 위기와 관련이 있으며, 그런 한 일종의 풍자적 역할을 했다.

홍범이 구축한 방은 그런 ‘실내의 위기’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낭만적이어야 할 유년 시절의 기억은 오히려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3D 모델링을 통해 구현된 방은 지나치게 정적이고 인위적이며, '가상적'이다. 또 명상적 분위기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침대와 창문, 상하운동을 하는 계단들은 포드주의적 자동기계를 연상시킨다. 이런 양면성—심리적일뿐만 아니라 기계론적인 요소—의 정적인 폭발은 어떤 근본적인 억압을 가늠케 한다.

어쩌면 잠실 아파트에서 세곡동으로의 탈출이 주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기계문명을 피해 안락하고 자연적 삶을 꿈꿨던 가정은,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빠르게 성장했던 자본주의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자연적 삶에 대한 믿음은 끝내 가상적인 것으로 억압됐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작업에서 실내에 비치된 집기와 가구들이 기계장치의 얼굴을 하며 느릿느릿 출몰하고 있었던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런 가설—80년대 억압되고 소외된 가정과 사회의 변증법—은 홍범의 개인사에 비춰봤을 때 설득력이 없지 않다. 예컨대, 세곡동은 1974년 대통령과 국빈, 군 전용으로 성남의 서울공항이 설치되면서 그 대로 주변으로 택지가 정리되기 시작했으며, 홍범의 가정은 부동산 차액을 노려 이 장소를 이사를 했다. 그 장소에서는 대통령 이하 국빈이 그 장소를 방문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겨야 했으며, 또 한편으론, 괴뢰군이 출몰한다는 소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렇게 작가의 사적인 경험은 당시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실내라는 사적 공간은 그것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것이 작가의 무의식 속에, 혹은 실내에 억압되었다면, <방문>은 그 억압을 유령처럼 귀환시킨다고 볼 수 없을까? 이렇게 봤을 때 <방문>의 요소요소—오래된 텔레비전 오브제부터 영상까지—는 작가의 유년시절의 억압된 심리적 기억을 경유해 80년대 사회적 심리의 한 풍경을 폭로하는 것은 아닐까?  (2015. 6.)

* 아마도애뉴얼날레 2015 도록에 쓰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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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lter Benjamin, “Surrealism: The Last Snapshot of the European Intelligentsia”, Selected Writings: Part 1 1927-1930, Michael W. Jennings, Howard Eiland, Gary Smith (tran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p. 210.

[2]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I, 조형준 역, (서울: 새물결, 2005), 111-112쪽.

[3] 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 (서울: 자음과 모음, 2011), 277쪽.

[4] 발터 벤야민, 앞의 책, 실내 흔적, 565-566쪽.

[5] 위의 책, 파리—19세기의 수도, 102쪽.

[6] 할 포스터,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전영백 역, (파주: 아트북스, 2005), 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