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5일 목요일

공공미술의 종언

한 때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여겨졌던 ‘공공성'과 ‘공공미술’이라는 미술 용어를 요즘 진보적인 미술 담론 안에서 들어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오늘날, 공공미술은 지나간 유행에 불과하다. 한 때 집단적으로 부과됐던 ‘공공성’에 관한 낭만주의적 환상이 불러일으킨 결과가—어쩌면 두 번째 새마을운동이라고 해도 무방할—미학적 건설주의의 폐허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규모의 공공미술 예산이 해마다 마련되고 있으며, 전국 각양각색의 예술가들이 모이고 있으며, 그 결과 공공미술 사업은 여전히 마치 유령처럼 예술계와 지자체 사이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여기에 관계된 예술가 중 어떤 누구도 공공미술에서 예술의 미래를 점치는 사람은 없다. 한편, 어떤 이들은 다른 종류의 미래를 공공미술에서 본다—예를 들어 정치의 미래, 복지의 미래, 행정의 미래. 따라서 오늘날 공공미술에는 어떤 냉소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행정의 권위에 도전한 “행정의 미학”에 대한, 행정의 위대한 복수, 즉 (말하자면 권미원이 지적한) “미학의 행정”에 대한 미술가들의 패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1]

“공공미술”은 왜 실패했을까?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엄밀한 공공성 개념의 부재를 문제점으로 지적해왔다. 하지만 그런 반성은 반쯤은 짓궂은 농담처럼 들린다. 미술이 이데올로기를 부연 설명하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기도 한 이상, 공공미술이 지금까지 생산되어왔다는 것은 곧 공공성에 대한 입장을 끊임없이 표명해왔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미술을 둘러싼 담론은 여전히 ‘공공성’ 개념에 대한 어떤 갈증으로 허덕이고 있다. 즉, 여전히 공공성 개념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미술이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아르코에서 2008년에 출간된 <공공성>이라는 선집이 그러한데, 철학, 행정학, 법학, 미학 등에서 규정하는 공공성의 의미를 제각각 규정하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시도다. 결론은? 합의될 수 없는 다양한 개념의 층위를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공공미술/공공성 개념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기 전에 최소한, 오늘날 한국에서, 공공미술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냉정하게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공공미술을 잘 모르고 시작했지만, “공공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종언 만큼은 최소한 확실하게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이쯤에서 내가 공공미술이라고 부르는 미술의 형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데, 권미원이 잘 정리했듯이, 첫째, 공공장소에 설치한 모더니즘 조각, 둘째, 건축-환경과 공모하는 공공디자인, 그리고 셋째, (뉴장르-공공미술과 그 지평으로 읽힐 수 있는) 행동주의 공공미술이다. 첫째의 경우, 소수자에게만 허락됐던 웰-메이드 예술의 향수적 측면을 대중 차원으로 확대시킨다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둘째의 경우, 첫째가 문화 소외자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서, 기능주의 미술로 전환하면서 이뤄졌다. 셋째의 경우, 문화 소외자의 참여 자체를 미술의 핵심으로 내세우며 그 전의 실패를 만회하려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미국의 공공미술 지원 제도의 변천사를 선형적으로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한국에서는 공공미술의 발전사로 오인되고 있다. 특히 마지막의 행동주의 미술은 (폐허를 비교적 적게 남긴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에서 가장 진일보한 공공미술의 버전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커뮤니티아트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행동주의 공공미술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과정을 작업의 몸통 삼아, 타자를 예술에 참여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꽤 낭만주의적인 투사로 보이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문제점을 주로 지적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예술가의 자리’에 관한 문제다. 이 문제는 발터 벤야민의 글 <생산자로서의 작가>에서 유사하게 지적된 적이 있다. 벤야민은 이 글에서 많은 부분을 “정신적 엘리트”로서의 좌파 부르주아 지식인-예술가를 비판하는 데 할애한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런 예술가는 “올바른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혁명적 노동자와 연대해서 부르주아 문화의 생산수단을 변혁시키는 것에 관심이 없다. 즉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혁명적 주체를 인정하지만, 현실의 계급투쟁이나 사회혁명에 진실로 냉소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벤야민에 의하면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옆에서’ 자신의 설 자리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2] 그러나 그것은 도대체 무슨 자리인가?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후원자의 자리, 즉 벤야민식으로 말하자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자리”다.”[3]

이데올로기적인 후원자가 종국에 실패하는 이유는, 그 자리가 확고하면 할 수록 노동자가 소외될 뿐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재현을 통해서 그 간극을 확실하게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4] 이것이 할 포스터가 “민족지학자로서의 미술가"에서 지적하는 바로, 오늘날 타자를 진리의 장소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가진 미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다. 예컨대 많은 커뮤니티아트는 사라져가는 지역 공동체의 문화를 상징계에 복귀시킴으로써 지배적인 문화를 비판하려 한다. 하지만 이렇게 미술에서 소환시킨 지역적 타자는 진정한 타자라기보다, 어쩌면 예술가-지식인 (혹은 그보다 상위의 주체가) 스스로를 타자에 투사한 결과, 오히려 ‘안전하게’ 재현된—말하자면 포르노그라피에 가까운—타자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은 “타자를 ‘자기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낡은 방식, 즉 타자를 여전히 자아를 돋보이게 하는 금박 장식쯤으로 남겨두는 (그 과정에서 이 자아가 아무리 곤란을 겪는다 해도) 방식으로 자아를 ‘타자화’할 것이다.”[5] 그 결과 지배적인 문화의 안티테제로서 ‘외부의 공포’로 남았어야 할 타자의 문화는, 박물관 유리에 잘 포장되어 질서정연하게 디스플레이 될는지도 모른다.

벤야민이 지적했던 이데올로기적 후원자가 생략한 생산수단의 변혁의 문제는 다음의 문제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자본의 문제다. 공공미술가가 그들의 작업에서 자본의 존재를 괄호치려는 경향이 있지만, 대부분의 공공미술은, 심지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프로젝트에 불과하더라도, 문예진흥기금과 같은 국가 규모의 지원금 없이는 실현/유지되기 힘들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텐데, 타자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후원하는 자가 공공미술가라면, 그 공공미술가를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정부와 지자체다. 그리고 이때 지원금은 보통 정치적/행정적 대의, 즉 “소외지역 생활환경 개선”과 같은 목적 하에 출연된다. (공공미술 추진위원회의 <아트인시티>,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안양시의 <APAP> 등을 떠올려 보라.) 따라서 지원금을 통해 추진되는 공공미술 ‘사업’에는 근본적인 차원의 어떤 정치경제학적 개입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정치경제학적 개입에 대해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김장언의 글 <상징과 소통, 공공미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에서 아주 상세히 잘 설명하고 있다. 김장언은 이 글에서 2000년대 중반 미술계의 핵심 키워드였던 공공미술이 사실은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한국사회 속에서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호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시장본위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근대적 국민-국가의 역할은 최소한으로 축소되는데, 이는 곧 사회적 갈등 요소를 통합해 줄 국가 차원의 사회적 안전장치—즉 공공성—가 모두 해제됨을 뜻한다. 이때, 신자유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국민국가는 어떻게 사회재통합을 기획할 것인가? 김장언은 “협치(governence)와 문화”라고 주장한다.[6]

공공미술은 이런 상황에서 호명된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다소 유연하게 작동하는 사회통합 장치로서 말이다. 이때 공공미술은 새롭게 고안된 복지모델이자,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생겨난 다양한 사회 경제적 문제를 상상적으로 해결하는 문화(산업) 모델이기도 하다. 공공미술이 전개되자, 전국의 달동네가 예술마을-기업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가? 공공미술의 근본적인 문제가 신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된다면, 우리는 분명히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공공미술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하의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의 예를 보자.

한때 동피랑 벽화마을은 공공미술의 모범 사례로 자랑스럽게 손꼽혔던 곳이다. 철거위기에 놓였던 달동네 동피랑 마을은, 대규모의 벽화작업을 통해 ‘벽화마을'로 거듭났으며, 덕분에 관광객이 몰려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동피랑 마을은 2013년 3월 생활협동조합 '동피랑 사람들'을 설립한 데 이어 마을기업으로 지정받았다.) 하지만 이 “한국의 몽마르뜨”가 ‘경쟁력’을 갖춰야 할 운명에 처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후 예술마을이 전국 규모로 난립하자 더이상 동피랑은 매력적인 관광지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업화한 마을은 벽화 비엔날레와 같은 규모의 행사를 기획/조성하여 장소마케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한편 그와 동시에 증가한 관광 수요는 동피랑을 더이상 주민의 생활 터전으로 남아있을 수 없도록 했다. 한 보도에 의하면 올해 초 벌써 5가구가 이사를 갔으며, 외지인 1명이 이 집을 모두 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 가운데 1곳은 커피숍으로 바뀌어 동피랑 사람들이 운영하는 점포보다 수입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7] 이런 현상을 일각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도심부촌화)이라고 부른다.

긴 예를 통해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어느 정도 드러난 것 같다. 동피랑 벽화마을의 문화전략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봉합하기 위한 정책적 전술전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달동네를 부촌화시킴에 따라 소외자를 양산시켰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선봉장 역할을 동시에 맡았다. 동피랑의 예에서 문화를 통한 지역 재생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동피랑의 공공미술이 간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동피랑의 문화적 부흥운동은 어쩌면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을 문화에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내가 보기에 동피랑의 문제는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공공미술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심지어 예술가가 지자체의 요구에 반할 경우에조차 그렇다. 많은 “진보적인” 공공미술가는 지자체와 행정가의 문화적 무지를 비난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창조해 놓은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지에 관해서는 행정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혹은 더욱 철저하게 위악적으로 이들과 공모한다. 공공미술가의 아킬레스건은 자본이다. 공공미술은 전지구적 자본에 함구할 때만 작동할 수 있는 문화논리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내가 보기에 공공적이지도, 미술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제도적이고, 행정적이다.) 하지만 공공미술은 여전히 정부와 지자체의 통합수단으로 막대한 규모의 예산이 투여되고 있고, 소외지역에는 유지관리 조차 되지 않은 볼품 없는 문화적 폐허가 즐비하게 양산되고 있다. 우리에게 여전히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되물어볼 수 있는 여유가 남아 있을까? 만약 그럴 여력이 있다면, 공공미술의 실패를 인정하고, 그것에 제동을 거는 일에 온 힘을 쏟는 것은 어떠한가? 온 국토를 헤집고 다니고 있는 이 좀비들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하기 보다는, 시름시름 앓고 있는 미술의 상황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어떤가? 14.12.09

* 산업예비군 도록에 기고됐음.
(짧은 보충은 여기로: http://be-writing.blogspot.kr/2015/11/blog-post_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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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미원, 『장소특정적 미술』, 김인규 외 2인 역, 현실문화사, 2013년, 81쪽.

[2] 발터 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반성완 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5년, 261쪽.

[3] 발터 벤야민, 위의 책, 같은 쪽.

[4] 할 포스터, 「민족지학자로서의 미술가」,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출판부, 2010년, 274쪽

[5] 할 포스터, 위의 책, 279쪽

[6] 김장언, 「상징과 소통 : 지금 한국에서 공공미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Visual』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 2010년 7호, 90쪽.

[7]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의 위기」, 『연합뉴스』, 2014년 4월 14일 17시 48분,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4/04/14/0907000000AKR20140414161600052.HTML (검색일: 2014년 12월 9일)

2015년 6월 19일 금요일

검은 그림 이야기

배윤환, 기름 붙일 곳을 찾는 사나이, 2014. 종이에 목탄, 오일파스텔, 가변설치

배윤환, 기름 붙일 곳을 찾는 사나이, 2014. 종이에 목탄, 오일파스텔, 가변설치


지금부터 내가 시작하려는 토막난 이야기는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 중 일부분이다. 그 누군가 또한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하며, 그 누군가는 아마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테니, 이 이야기의 기원은 아마, 18세기 정도로 어림짐작 할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부터 내가 말할 수 밖에 없는(해야만 하는) 이야기에 대해 여러분이 어느 정도 흥미를 느껴하지 않을까 짐작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기대만큼 흥미롭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서도), 외려 그보다 나는 지금, 그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싶다. 이 이야기에는 무언가 대단히 악의적인 어떤 것이 깃들어 있으며,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자는 하나 같이 불행해져 갔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가 토막난 이야기라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일 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에 대해서는 보증된 바가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 * *

애써서 찾기 힘든, 존재조차 희미한 먼 지방 어딘가에 작은 별장이 하나 지어졌다. 높은 언덕에 지어진, 이층짜리 전원주택이었다. 언젠가부터 이 별장에는 사교를 믿는 위대한 술사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술사는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악령을 불러내고 있다고 한다. 그 술사는 동물의 사체로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데, 그 그림은 칠흑같이 어두우며, 그 그림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고 한다. 이 술사는 한 달에 한 번 물감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밖을 나선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종종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이 실종되곤 하는데, 번번이 그 흉수로 이 술사가 지목됐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이 별장 근방을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이런 풍문은 진실처럼 굳게 믿어지고 있다.

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낡은 별장은 명망 있는 궁정화가가 지었다고 한다. 그 화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싸움질과 칼질을 일삼았으며, 수많은 연애담을 만들었을 만큼 성급한 성격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찍이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할 정도로 천부적인 화가의 재능을 타고나 유명세를 떨쳤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의 회화의 뛰어난 소묘와 찬란하게 빛나는 색감은 많은 왕실과 귀족들이 사랑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는 대형 제단화 작업에 다수 참여했으며,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무수히 도맡아 그렸다고 한다. 그 명망 있는 궁정화가는 큰 병을 앓은 후,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 * *

그가 건강 회복을 위해 지방으로 가도 좋다고 궁정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그에게 덮친 병마는, 그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 당시 그가 보낸 편지를 보면, 그 병에 관한 일화가 종종 언급되고 있는데, 그 병은 머릿속에서 야기되는 병이라고 한다. 후일 그의 회고에 따르면 머릿속에서 굉장한 소음이 들렸다고 한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 소리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그는 꽤나 심한 신경증에 시달리게 됐다. 그 소리는 교묘한 울림이었으며, 깊고 진한 무엇이었다. 그것의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부터 그는 그것이 (인지조차 하지 못한) 어떤 사소한 잘못으로 인해 걸린 일종의 저주이며, 영원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신과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그 소리를 듣기 시작할 때쯤이었을 것이다. 그 내부의 소리는 외부의 소리를 점점 침식하더니, 그는 곧 바깥으로부터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남들은 그것을 귀머거리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면 여전히 어떤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깊고 넓은 고요의 한 복판에서 풍부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조차 한 귀머거리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점도 함께 언급해야만 하겠다. 거듭 확실한 것은, 병이 가라앉았을 때, 그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질병앓이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말았다. 귀머거리가 되면서 인간사회와의 접촉이 제한돼버리자, 환상적인 것에 대한 그의 경향이 짙어졌고, 극적이고 몽상적인 것에 대한 집념도 더욱 강해졌다. 병으로 인해 산란해진 그의 상상과 망상이 점점 그를 옭아맸다.


* * *

벽난로의 온기는 졸음을 부른다. 분명히 무언가를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눈꺼풀이 희미하게 덮이고 있을 찰나, 바닥에 세워 놓은 물감통 뒤에서 거뭇한 형상이 빠르게 지나갔다. 분명히 그것은 쥐다. 검은 쥐! 그는 평소에 쥐를 특별히 혐오하고 있었는데 그 감정은, 격렬한 분노의 감정과도 더욱 가까웠다. 작고 미약하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것에 대한 그 어떤, 무척이나 신경질적인 감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감을 양 손으로 쓸어버렸다. 놀란 검은 쥐는 (물론 그는 듣지 못했겠지만) 찍찍 소리를 내며 테이블 밑으로 뛰었으며 이내 사라졌다. 안달이 난 그는 양초에 불을 붙인 후 몽둥이로 쓸 빗자루 들고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그의 검고 붉은 눈은 그 작고 검은 쥐의 형상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포착하려 했으나, 검은 그림자는 용의주도하게 그 시선으로부터 미끄러져 갔다.

검은 쥐는 여전히 찍찍 소리를 내며 작업실 안을 종횡무진 뛰어 다녔다. 순간 그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는데, 그 검은 쥐가 물컹하고 진득한 무엇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검은 쥐가 뛸 때마다 기름 같은 철벅철벅한 무언가가 흘러 내렸고, 그럴수록 작업실의 물감은 하나 둘씩 검게 변해갔다. 나는 조급해졌다. 그 칠흑 같은 검은 색 위에 그 어떤 색이 군림할 수 있으랴! 그는 조심히 붓을 들고 기회를 노렸다. 그 검은 쥐는 바닥에 흘러내리는 물감을 탐욕스럽게 핥아 먹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검은 쥐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것을 향해 붓을 냅다 푹 찔렀다.


* * *

그는 거대한 불을 보고 있었다. 그 불길이 어찌나 맹렬하던지, 순식간에 집 몇 채가 무너졌고, 온 천지가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문득 그는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거대한 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그것을 그리고 싶어졌다. 거대한 불은 거대한 연기다. 거대한 연기는 거대한 어둠이다. 사람들이 연기와 화염 속에서 기절한 남자와 여자를 구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뭉개졌다. 어둠이 그들의 눈알과, 머리통과, 팔과, 다리를, 파먹어 들어갔다. 그는 어둠을, 그 집합적인 형태를, 그 검은색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재난을 피하고자 허둥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화면의 전경 한 쪽 구석에 있고, 그리고 커다란 불길이 반사된 것과 같은 색채를 띤 검은 구름이 그것을 감싸고 있다. 배경을 나타내는 어떤 구체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도망치려 하거나 생존자를 구하려고 하는 무리진 사람들 위로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빛, 즉 형태 없는 연기에 싸인 강렬한 빛만이 있을 뿐이다.>


* * *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바닥에 앉아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양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식사는커녕, 심지어 화장실도 가지 않고 수 시간 동안 그러고 있는 것이 일이었다. (종종 호사가들이 호들갑을 떨기를, 그 모습이 마치 살덩이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옆에는 이젤 위에 올려진 텅 빈 캔버스가 그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사실, 텅 빈 캔버스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한 때 명망 있는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텅 빈 캔버스 앞에서 참을 수 없이 미약하고 하등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그 캔버스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텅 빈 캔버스. 그 캔버스는 원래 앨버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10여 년 전에 마련한 것이었다.

앨버는 명망 있는 공작부인으로, 타고난 미모와 개성 때문에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았으며, 심지어 여왕으로부터도 시샘을 받던 여자였다. 그와 앨버가 밀월 관계였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앨버 부인은 예술 밖에 알지 못했던 고귀한 아카데미의 수장을 존경심과 애정으로 대했다. 앨버 부인은 그의 예술을 사랑했고, 모델 역할을 기꺼이 청하기도 했다. 그와 그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앨버 부인은 공작의 아내였다.

하지만 아깝게도 그녀는 아름다움을 채 꽃피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지독한 열병에 걸려서 수일 만에 유명했다는 사인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지만, 그 외에도 잡스럽고 불쾌한 소문과 의혹들 또한 많이 존재한다는 점도 함께 언급되어야만 하겠다.


* * *

그는 캔버스를 천천히 응시하고자 했다. 원래 10년 전에 그려졌어야만 하는 텅 빈 캔버스였다. 몸이 파르르 떨려왔고, 어쩐지 슬픈 감정이 들었다. 그 텅 빈 캔버스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 텅 빈 캔버스는 문득, 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칠흑보다 검은 쥐 말이다. 그는 마치 찢어발기려는 듯한 기세로, 고양이 마냥 손톱을 세워 캔버스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는 어둠과 한 덩어리로 뒤엉키게 되었는데, 남들이 봤다면 그가 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을 테다. 그와 상관 없이 어둠은 점점 짙어져갔다. 그는 어둠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상냥하게 말을 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손은 어둠을 만지려고 했다. 그는 어둠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곰과 부엉이와 개와 말이 그의 주변을 빙빙 날며 이 광경을 찬양했다.


* * *

그는 붓을 들고 있었다. 검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두껍고도 큰 붓이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초점 없는 눈으로 닥치는 대로, 손에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빠른 속도로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능숙한 나머지 그의 손이 붓이나 몽둥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의 붓은 점점 닳아갔다. 그의 손은 점점 닳아갔다. 그의 몸은 점점 닳아갔다. 텅 빈 캔버스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점점 소진되어가고 있었다.


* * *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시골 마을의 음습한 작은 별장은 대단히 심각한 화재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화재를 말할 것 같으면, 사흘 동안 불이 타올랐고, 사흘 동안 내린 비에 의해 가까스로 꺼졌으며,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그 열기 때문에 사흘 동안 옷을 벗고 살았다느니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소문에 의하면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 검은 페인팅이 하나 발견됐는데, 인근 마을의 농부가 땔감이나 하려고 가져다 놓은 것을 고귀하신 어떤 분께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사갔다고 전해진다. (14.1.14)

* 배윤환 <기름 붙일 곳을 찾는 사나이> 서문으로 쓰였음. 

홍범의 <방문>에 관한 노트

홍범, 방문, 2015, 티비, 애니메이션, 설치


[브루통과 초현실주의자들은] 철지난 것—초기 철골 구조물, 초기 공장 건물, 초기 사진, 사라져가는 물건, 그랜드 피아노, 5년 전에 유행했던 드레스, 한 때 최첨단 유행을 대표했지만 이제는 유행에 뒤떨어져버린 레스토랑과 같은 것—에서 발산되는 혁명적 에너지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 이런 선지자나 예언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어떻게 빈곤—사회적 빈곤뿐만 아니라 건축의 빈곤, 실내 인테리어의 빈곤, 복종하고 복종시키는 물건들—이 갑자기 혁명적 허무주의로 변화할 수 있는지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1] 발터 벤야민, 초현실주의 (1929)

홍범은 <방문Visiting> (2015)에서 8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세곡동 가옥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는 기억 속의 방들을 심리적 성격이 강한 3D 애니메이션으로 모델링한 뒤, 그 결과를 수 개의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를 사용해 상영했다. 일점투시로 깔끔하게 구획된 모노톤의 방들은 고요하고 명상적이며 심지어 적막하다. 다만, 실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요소들이 미묘하게 작동하면서 그 공간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그 움직임은 마치 잘 만든 기계장치처럼 규칙적이고, 또 조용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작가가 유년 시절의 집을 다시 방문하는 느낌으로 제작했다고 하는 이 작업은 불특정하고 오래된 심상으로 보는 자를 인도한다. 이런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1차적인 요인은 아무래도 오래된 텔레비전 수상기와 그것이 만들어내고 있는 미세한 화면의 노이즈일 테다. 대화면의 LCD패널을 통해 안정적이고 선명하게 영상을 뿌려주는 오늘날의 최신식 텔레비전과 비교했을 때, 이런 소형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확연히 다른 기계라고 해도 좋을만큼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 오래된 물건은 한 때는, 80년대 쯤엔 여전히 어른들과 아이들의 주목을 끌었던 진기하고 새로운 물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때 당당하고 화려했던 영웅이 조락한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지금은 상실해버린 소중했던 것을 다시 상기하는 한편, 현재 마저도 멜랑콜리하게 보게 될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의 특별한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이런 종류의 멜랑콜리는 때로는 현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혁명적 허무주의가 되기도 한다. 발터 벤야민은 <파리—19세기의 수도>에서 19세기에 만들어진 철지난 상품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부르주아지의 폐허들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것은 발자크였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처음으로 이 폐허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생산력의 발전은 19세기의 소망들을, 심지어 그것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기념비들이 채 붕괴되기도 전에 벌써 산산조각 내버렸다. 16세기에 과학이 철학에서 해방된 것처럼 19세기에는 이러한 발전이 조형 형식들을 예술에서 해방시켜주었다. […] 이러한 생산물은 모두 이제 막 상품으로 시장에 들어갈 참이었다. 하지만 아직 문턱에서 주저하고 있다. 아케이드와 실내, 박람회장과 파노라마는 이러한 주저의 시대의 산물이다. 꿈의 세계의 잔재인 것이다. […] 상품 경제의 동요와 함께 우리는 부르주아지가 세운 기념비들이 실제로 붕괴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들을 폐허로 간파하기 시작한다.[2] 

요컨대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한 오래된 물건이 유아기의 자본주의의 실체를 폭로한다고 보았다. 부르주아가 그토록 아꼈던, 그 영원할 것 같았던 물건이 채 낡기도 전에 오래되어 사라져가는 모습은 부르주아의 문화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또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런 한에서 초현실주의자의 오래된 물건은 그 음울한 기운으로 선진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진보성을 경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이제는 망각해버린 과거의 유토피아적 힘을 그 사물 속에서 불러 내어, 다른 실천적 방식으로 변용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홍범의 텔레비전 오브제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2011)를 쓴 박해천에 따르면, 한국에서 텔레비전 수상기는 60년대 이후 80년대까지도 텔레비전은 “과시적 오브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후한 가정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원목 재질의 가구 느낌으로 텔레비전은 디자인 되어 각종 장식이나 종종 문까지 달려 시판되었다.[3] 텔레비전 디자인은 실내 구조와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화했지만, 거기에 부과된 ‘실내 분위기와 어울릴 것’이란 지상 명령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 이유는 텔레비전은 중산층의 상징이자, 가정의 여유와 안락함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 홍범은 텔레비전, 냉장고 등 남들 집에도 다 있는 평범한 것이라 하며, 자신의 집을 평범한 중산층 가정으로 묘사했다. 만약 그렇다면, 홍범의 가정은 박해천이 주장했던 80년대 인테리어의 문법의 자장 속에 있었다고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런 한 홍범의 텔레비전은 80년대 중산층의 오래된 꿈이자 미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이 분석한 초현실주의 오브제처럼, <방문>에서 소환시킨 그 오래된 텔레비전는 80년대 중산층의 꿈의 기념비이자 폐허일 수 있다. 그 꿈은 한 때 절실했지만 "채 붕괴되기도 전에 벌써 산산조각"나서 그 오래된 텔레비전 속에 암호화 된 것이다. <방문>은 거기에 암호화된 잡다한 기억을 되살린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생략하고 망각했던 80년대 유토피아의 진실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것의 덧없음에 대해 경고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텔레비전 모니터가 반영하고 있는 오래된 기억의 방의 이미지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홍범의 가족은 원래 잠실의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중산층 가정으로, 세곡동 단지 개발에 발 맞추어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이것은 70년대 중후반쯤부터 강남권에서 서서히 과열되기 시작한 아파트 투기 열풍과는 어쩌면 상반되는 행보로, 여기에는 사각형으로 이뤄진 비좁은 땅에서의 옹졸한 ‘모던 라이프’ 에서부터 가족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어느 정도 강하게 포함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덕에 홍범은 유년 시절을 자연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작가는 집이 마치 보물창고와 같았다고 회상했다. 몇 개의 종류의 방을 보여주는 영상 시리즈는 작가의 소중한 기억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종의 스스로를 위한 환등상이다. 

그러니까 집이라는 사적 공간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유년시절의 작가를 지켜준 그 친밀함의 요체이며, 그 속에는 그 시절의 모든 근원적인 꿈과 낭만이 포개져 있다.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키에르케고르가 환경에 녹아있는 기억의 중요성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이미지의 틀을 이루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이것이 기억 속에,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혼 전체에 가장 강하고 깊이 새겨져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나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 작은 방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로드레리아를 떠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4] 이 인용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주관적으로 파악된 공간의 기억을 생생하고 진실된 것으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어서 벤야민은 같은 책에서 키에르케고르의 글에 대한 아도르노의 주석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외적인 역사가 내적인 역사에서는 반영된 모습으로 존재하듯이 실내에서 공간은 가상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단순히 반영되거나 반영하는 주관 내적인 현실은 모두 가상이라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내의 형상들에서는 공간적인 것이 가상이 된다는 것도 꽤뚫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물들이 그의 오류를 폭로한다. […] 실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은 단순한 장식에 불과하다 […] 자아는 상품과 상품들의 역사적 본질에 의해 바로 자기 영역에서 압도당한다. 상품의 가상적 성격은 역사적, 경제적으로 사물과 사용가치의 소외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 소외된 사물에서는 소외 그 자체가 바로 표현으로 모습을 바꾼다. […] 그리하여 말없는 사물이 ‘상징'으로서 말한다. 주거 공간에 사물을 정리하는 것을 배치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가상인 사물들이 여기에서는 변하지 않는 자연의 가상으로 배치된다. 유기적인 생명으로서의 꽃, 먼 곳에 대한 동경의 고향인 오리엔트, 영원함 그 자체를 형상하는 바다의 모습 등 고풍스러운 형상이 실내에 떠오른다. 사물들이 각자의 역사적 순간에 의해 운명처럼 짊어지게 되는 가상이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5]

요컨대 길게 인용한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실내 공간이나 그것을 장식하고 있는 물건에 실존성을 동여매려는 키에르케고르의 시도는 이미 소외된 사물에 의해 가상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내는 환등상으로서, 부르주아 개인의 사생활을 노동과 같은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가상의) 방벽, 혹은 도피처로 이해됐다. 사람들은 거기서, 가상의 사물을 통해, 가상의 자연을 구현했다. 그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자아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벤야민은 <파리—19세기의 수도>에서 루이-필립 치세에서 등장한 최초의 부르주아의 실내 공간이 외부 공간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는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개인에게 있어 최초로 생활 공간이 노동 장소와 대립된다. 이제 생활 실내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계산대는 실내의 하나의 보완물이 지나지 않게 된다. 계산대에 앉아 세상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개인은 실내에 넘쳐나는 여러가지 환상에 편안하게 해줄 것을 요구한다. [...] 이로부터 환(등)상에 빠진 실내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에게는 우주를 대변하게 된다. 그는 이 실내에 멀리 있는 곳과 과거를 수집해 들인다. 그의 거실은 세계 극장의 박스석이다.[6]

하지만 실내라는 방벽은 실제로 외부세계의 방벽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할 포스터는 여기에 대해 정확히 지적했다. 그는 기디온을 참조하며, 당시 산업 생산품의 폭발적 증가와 “상징의 가치 저하”는 부르주아 실내공간이 안전한 장소로 남지 못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산업 생산품의 진보는 부르주아의 귀족적 수집품을 “키치화”했으며, “그 물건들은 마침내 소외의 과정을 겪으며 ‘소망과 불안’의 암호가 되어버렸다.”[6] 포스터는 이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부르주아 주체의 심리적 위기와 관련이 있으며, 그런 한 일종의 풍자적 역할을 했다.

홍범이 구축한 방은 그런 ‘실내의 위기’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낭만적이어야 할 유년 시절의 기억은 오히려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3D 모델링을 통해 구현된 방은 지나치게 정적이고 인위적이며, '가상적'이다. 또 명상적 분위기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침대와 창문, 상하운동을 하는 계단들은 포드주의적 자동기계를 연상시킨다. 이런 양면성—심리적일뿐만 아니라 기계론적인 요소—의 정적인 폭발은 어떤 근본적인 억압을 가늠케 한다.

어쩌면 잠실 아파트에서 세곡동으로의 탈출이 주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기계문명을 피해 안락하고 자연적 삶을 꿈꿨던 가정은,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빠르게 성장했던 자본주의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자연적 삶에 대한 믿음은 끝내 가상적인 것으로 억압됐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작업에서 실내에 비치된 집기와 가구들이 기계장치의 얼굴을 하며 느릿느릿 출몰하고 있었던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런 가설—80년대 억압되고 소외된 가정과 사회의 변증법—은 홍범의 개인사에 비춰봤을 때 설득력이 없지 않다. 예컨대, 세곡동은 1974년 대통령과 국빈, 군 전용으로 성남의 서울공항이 설치되면서 그 대로 주변으로 택지가 정리되기 시작했으며, 홍범의 가정은 부동산 차액을 노려 이 장소를 이사를 했다. 그 장소에서는 대통령 이하 국빈이 그 장소를 방문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겨야 했으며, 또 한편으론, 괴뢰군이 출몰한다는 소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렇게 작가의 사적인 경험은 당시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실내라는 사적 공간은 그것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것이 작가의 무의식 속에, 혹은 실내에 억압되었다면, <방문>은 그 억압을 유령처럼 귀환시킨다고 볼 수 없을까? 이렇게 봤을 때 <방문>의 요소요소—오래된 텔레비전 오브제부터 영상까지—는 작가의 유년시절의 억압된 심리적 기억을 경유해 80년대 사회적 심리의 한 풍경을 폭로하는 것은 아닐까?  (2015. 6.)

* 아마도애뉴얼날레 2015 도록에 쓰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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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lter Benjamin, “Surrealism: The Last Snapshot of the European Intelligentsia”, Selected Writings: Part 1 1927-1930, Michael W. Jennings, Howard Eiland, Gary Smith (tran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p. 210.

[2]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I, 조형준 역, (서울: 새물결, 2005), 111-112쪽.

[3] 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 (서울: 자음과 모음, 2011), 277쪽.

[4] 발터 벤야민, 앞의 책, 실내 흔적, 565-566쪽.

[5] 위의 책, 파리—19세기의 수도, 102쪽.

[6] 할 포스터,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전영백 역, (파주: 아트북스, 2005), 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