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9일 금요일

홍범의 <방문>에 관한 노트

홍범, 방문, 2015, 티비, 애니메이션, 설치


[브루통과 초현실주의자들은] 철지난 것—초기 철골 구조물, 초기 공장 건물, 초기 사진, 사라져가는 물건, 그랜드 피아노, 5년 전에 유행했던 드레스, 한 때 최첨단 유행을 대표했지만 이제는 유행에 뒤떨어져버린 레스토랑과 같은 것—에서 발산되는 혁명적 에너지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 이런 선지자나 예언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어떻게 빈곤—사회적 빈곤뿐만 아니라 건축의 빈곤, 실내 인테리어의 빈곤, 복종하고 복종시키는 물건들—이 갑자기 혁명적 허무주의로 변화할 수 있는지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1] 발터 벤야민, 초현실주의 (1929)

홍범은 <방문Visiting> (2015)에서 8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세곡동 가옥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는 기억 속의 방들을 심리적 성격이 강한 3D 애니메이션으로 모델링한 뒤, 그 결과를 수 개의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를 사용해 상영했다. 일점투시로 깔끔하게 구획된 모노톤의 방들은 고요하고 명상적이며 심지어 적막하다. 다만, 실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요소들이 미묘하게 작동하면서 그 공간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그 움직임은 마치 잘 만든 기계장치처럼 규칙적이고, 또 조용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작가가 유년 시절의 집을 다시 방문하는 느낌으로 제작했다고 하는 이 작업은 불특정하고 오래된 심상으로 보는 자를 인도한다. 이런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1차적인 요인은 아무래도 오래된 텔레비전 수상기와 그것이 만들어내고 있는 미세한 화면의 노이즈일 테다. 대화면의 LCD패널을 통해 안정적이고 선명하게 영상을 뿌려주는 오늘날의 최신식 텔레비전과 비교했을 때, 이런 소형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확연히 다른 기계라고 해도 좋을만큼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 오래된 물건은 한 때는, 80년대 쯤엔 여전히 어른들과 아이들의 주목을 끌었던 진기하고 새로운 물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때 당당하고 화려했던 영웅이 조락한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지금은 상실해버린 소중했던 것을 다시 상기하는 한편, 현재 마저도 멜랑콜리하게 보게 될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의 특별한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이런 종류의 멜랑콜리는 때로는 현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혁명적 허무주의가 되기도 한다. 발터 벤야민은 <파리—19세기의 수도>에서 19세기에 만들어진 철지난 상품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부르주아지의 폐허들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것은 발자크였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처음으로 이 폐허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생산력의 발전은 19세기의 소망들을, 심지어 그것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기념비들이 채 붕괴되기도 전에 벌써 산산조각 내버렸다. 16세기에 과학이 철학에서 해방된 것처럼 19세기에는 이러한 발전이 조형 형식들을 예술에서 해방시켜주었다. […] 이러한 생산물은 모두 이제 막 상품으로 시장에 들어갈 참이었다. 하지만 아직 문턱에서 주저하고 있다. 아케이드와 실내, 박람회장과 파노라마는 이러한 주저의 시대의 산물이다. 꿈의 세계의 잔재인 것이다. […] 상품 경제의 동요와 함께 우리는 부르주아지가 세운 기념비들이 실제로 붕괴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들을 폐허로 간파하기 시작한다.[2] 

요컨대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한 오래된 물건이 유아기의 자본주의의 실체를 폭로한다고 보았다. 부르주아가 그토록 아꼈던, 그 영원할 것 같았던 물건이 채 낡기도 전에 오래되어 사라져가는 모습은 부르주아의 문화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또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런 한에서 초현실주의자의 오래된 물건은 그 음울한 기운으로 선진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진보성을 경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이제는 망각해버린 과거의 유토피아적 힘을 그 사물 속에서 불러 내어, 다른 실천적 방식으로 변용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홍범의 텔레비전 오브제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2011)를 쓴 박해천에 따르면, 한국에서 텔레비전 수상기는 60년대 이후 80년대까지도 텔레비전은 “과시적 오브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후한 가정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원목 재질의 가구 느낌으로 텔레비전은 디자인 되어 각종 장식이나 종종 문까지 달려 시판되었다.[3] 텔레비전 디자인은 실내 구조와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화했지만, 거기에 부과된 ‘실내 분위기와 어울릴 것’이란 지상 명령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 이유는 텔레비전은 중산층의 상징이자, 가정의 여유와 안락함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 홍범은 텔레비전, 냉장고 등 남들 집에도 다 있는 평범한 것이라 하며, 자신의 집을 평범한 중산층 가정으로 묘사했다. 만약 그렇다면, 홍범의 가정은 박해천이 주장했던 80년대 인테리어의 문법의 자장 속에 있었다고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런 한 홍범의 텔레비전은 80년대 중산층의 오래된 꿈이자 미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이 분석한 초현실주의 오브제처럼, <방문>에서 소환시킨 그 오래된 텔레비전는 80년대 중산층의 꿈의 기념비이자 폐허일 수 있다. 그 꿈은 한 때 절실했지만 "채 붕괴되기도 전에 벌써 산산조각"나서 그 오래된 텔레비전 속에 암호화 된 것이다. <방문>은 거기에 암호화된 잡다한 기억을 되살린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생략하고 망각했던 80년대 유토피아의 진실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것의 덧없음에 대해 경고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텔레비전 모니터가 반영하고 있는 오래된 기억의 방의 이미지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홍범의 가족은 원래 잠실의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중산층 가정으로, 세곡동 단지 개발에 발 맞추어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이것은 70년대 중후반쯤부터 강남권에서 서서히 과열되기 시작한 아파트 투기 열풍과는 어쩌면 상반되는 행보로, 여기에는 사각형으로 이뤄진 비좁은 땅에서의 옹졸한 ‘모던 라이프’ 에서부터 가족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어느 정도 강하게 포함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덕에 홍범은 유년 시절을 자연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작가는 집이 마치 보물창고와 같았다고 회상했다. 몇 개의 종류의 방을 보여주는 영상 시리즈는 작가의 소중한 기억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종의 스스로를 위한 환등상이다. 

그러니까 집이라는 사적 공간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유년시절의 작가를 지켜준 그 친밀함의 요체이며, 그 속에는 그 시절의 모든 근원적인 꿈과 낭만이 포개져 있다.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키에르케고르가 환경에 녹아있는 기억의 중요성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이미지의 틀을 이루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이것이 기억 속에,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혼 전체에 가장 강하고 깊이 새겨져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나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 작은 방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로드레리아를 떠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4] 이 인용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주관적으로 파악된 공간의 기억을 생생하고 진실된 것으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어서 벤야민은 같은 책에서 키에르케고르의 글에 대한 아도르노의 주석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외적인 역사가 내적인 역사에서는 반영된 모습으로 존재하듯이 실내에서 공간은 가상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단순히 반영되거나 반영하는 주관 내적인 현실은 모두 가상이라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내의 형상들에서는 공간적인 것이 가상이 된다는 것도 꽤뚫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물들이 그의 오류를 폭로한다. […] 실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은 단순한 장식에 불과하다 […] 자아는 상품과 상품들의 역사적 본질에 의해 바로 자기 영역에서 압도당한다. 상품의 가상적 성격은 역사적, 경제적으로 사물과 사용가치의 소외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 소외된 사물에서는 소외 그 자체가 바로 표현으로 모습을 바꾼다. […] 그리하여 말없는 사물이 ‘상징'으로서 말한다. 주거 공간에 사물을 정리하는 것을 배치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가상인 사물들이 여기에서는 변하지 않는 자연의 가상으로 배치된다. 유기적인 생명으로서의 꽃, 먼 곳에 대한 동경의 고향인 오리엔트, 영원함 그 자체를 형상하는 바다의 모습 등 고풍스러운 형상이 실내에 떠오른다. 사물들이 각자의 역사적 순간에 의해 운명처럼 짊어지게 되는 가상이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5]

요컨대 길게 인용한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실내 공간이나 그것을 장식하고 있는 물건에 실존성을 동여매려는 키에르케고르의 시도는 이미 소외된 사물에 의해 가상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내는 환등상으로서, 부르주아 개인의 사생활을 노동과 같은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가상의) 방벽, 혹은 도피처로 이해됐다. 사람들은 거기서, 가상의 사물을 통해, 가상의 자연을 구현했다. 그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자아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벤야민은 <파리—19세기의 수도>에서 루이-필립 치세에서 등장한 최초의 부르주아의 실내 공간이 외부 공간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는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개인에게 있어 최초로 생활 공간이 노동 장소와 대립된다. 이제 생활 실내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계산대는 실내의 하나의 보완물이 지나지 않게 된다. 계산대에 앉아 세상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개인은 실내에 넘쳐나는 여러가지 환상에 편안하게 해줄 것을 요구한다. [...] 이로부터 환(등)상에 빠진 실내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에게는 우주를 대변하게 된다. 그는 이 실내에 멀리 있는 곳과 과거를 수집해 들인다. 그의 거실은 세계 극장의 박스석이다.[6]

하지만 실내라는 방벽은 실제로 외부세계의 방벽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할 포스터는 여기에 대해 정확히 지적했다. 그는 기디온을 참조하며, 당시 산업 생산품의 폭발적 증가와 “상징의 가치 저하”는 부르주아 실내공간이 안전한 장소로 남지 못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산업 생산품의 진보는 부르주아의 귀족적 수집품을 “키치화”했으며, “그 물건들은 마침내 소외의 과정을 겪으며 ‘소망과 불안’의 암호가 되어버렸다.”[6] 포스터는 이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부르주아 주체의 심리적 위기와 관련이 있으며, 그런 한 일종의 풍자적 역할을 했다.

홍범이 구축한 방은 그런 ‘실내의 위기’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낭만적이어야 할 유년 시절의 기억은 오히려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3D 모델링을 통해 구현된 방은 지나치게 정적이고 인위적이며, '가상적'이다. 또 명상적 분위기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침대와 창문, 상하운동을 하는 계단들은 포드주의적 자동기계를 연상시킨다. 이런 양면성—심리적일뿐만 아니라 기계론적인 요소—의 정적인 폭발은 어떤 근본적인 억압을 가늠케 한다.

어쩌면 잠실 아파트에서 세곡동으로의 탈출이 주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기계문명을 피해 안락하고 자연적 삶을 꿈꿨던 가정은,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빠르게 성장했던 자본주의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자연적 삶에 대한 믿음은 끝내 가상적인 것으로 억압됐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작업에서 실내에 비치된 집기와 가구들이 기계장치의 얼굴을 하며 느릿느릿 출몰하고 있었던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런 가설—80년대 억압되고 소외된 가정과 사회의 변증법—은 홍범의 개인사에 비춰봤을 때 설득력이 없지 않다. 예컨대, 세곡동은 1974년 대통령과 국빈, 군 전용으로 성남의 서울공항이 설치되면서 그 대로 주변으로 택지가 정리되기 시작했으며, 홍범의 가정은 부동산 차액을 노려 이 장소를 이사를 했다. 그 장소에서는 대통령 이하 국빈이 그 장소를 방문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겨야 했으며, 또 한편으론, 괴뢰군이 출몰한다는 소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렇게 작가의 사적인 경험은 당시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실내라는 사적 공간은 그것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것이 작가의 무의식 속에, 혹은 실내에 억압되었다면, <방문>은 그 억압을 유령처럼 귀환시킨다고 볼 수 없을까? 이렇게 봤을 때 <방문>의 요소요소—오래된 텔레비전 오브제부터 영상까지—는 작가의 유년시절의 억압된 심리적 기억을 경유해 80년대 사회적 심리의 한 풍경을 폭로하는 것은 아닐까?  (2015. 6.)

* 아마도애뉴얼날레 2015 도록에 쓰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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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lter Benjamin, “Surrealism: The Last Snapshot of the European Intelligentsia”, Selected Writings: Part 1 1927-1930, Michael W. Jennings, Howard Eiland, Gary Smith (tran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p. 210.

[2]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I, 조형준 역, (서울: 새물결, 2005), 111-112쪽.

[3] 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 (서울: 자음과 모음, 2011), 277쪽.

[4] 발터 벤야민, 앞의 책, 실내 흔적, 565-566쪽.

[5] 위의 책, 파리—19세기의 수도, 102쪽.

[6] 할 포스터,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전영백 역, (파주: 아트북스, 2005),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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