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9일 금요일

검은 그림 이야기

배윤환, 기름 붙일 곳을 찾는 사나이, 2014. 종이에 목탄, 오일파스텔, 가변설치

배윤환, 기름 붙일 곳을 찾는 사나이, 2014. 종이에 목탄, 오일파스텔, 가변설치


지금부터 내가 시작하려는 토막난 이야기는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 중 일부분이다. 그 누군가 또한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하며, 그 누군가는 아마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테니, 이 이야기의 기원은 아마, 18세기 정도로 어림짐작 할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부터 내가 말할 수 밖에 없는(해야만 하는) 이야기에 대해 여러분이 어느 정도 흥미를 느껴하지 않을까 짐작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기대만큼 흥미롭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서도), 외려 그보다 나는 지금, 그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싶다. 이 이야기에는 무언가 대단히 악의적인 어떤 것이 깃들어 있으며,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자는 하나 같이 불행해져 갔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가 토막난 이야기라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일 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에 대해서는 보증된 바가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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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서 찾기 힘든, 존재조차 희미한 먼 지방 어딘가에 작은 별장이 하나 지어졌다. 높은 언덕에 지어진, 이층짜리 전원주택이었다. 언젠가부터 이 별장에는 사교를 믿는 위대한 술사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술사는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악령을 불러내고 있다고 한다. 그 술사는 동물의 사체로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데, 그 그림은 칠흑같이 어두우며, 그 그림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고 한다. 이 술사는 한 달에 한 번 물감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밖을 나선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종종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이 실종되곤 하는데, 번번이 그 흉수로 이 술사가 지목됐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이 별장 근방을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이런 풍문은 진실처럼 굳게 믿어지고 있다.

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낡은 별장은 명망 있는 궁정화가가 지었다고 한다. 그 화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싸움질과 칼질을 일삼았으며, 수많은 연애담을 만들었을 만큼 성급한 성격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찍이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할 정도로 천부적인 화가의 재능을 타고나 유명세를 떨쳤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의 회화의 뛰어난 소묘와 찬란하게 빛나는 색감은 많은 왕실과 귀족들이 사랑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는 대형 제단화 작업에 다수 참여했으며,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무수히 도맡아 그렸다고 한다. 그 명망 있는 궁정화가는 큰 병을 앓은 후,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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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건강 회복을 위해 지방으로 가도 좋다고 궁정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그에게 덮친 병마는, 그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 당시 그가 보낸 편지를 보면, 그 병에 관한 일화가 종종 언급되고 있는데, 그 병은 머릿속에서 야기되는 병이라고 한다. 후일 그의 회고에 따르면 머릿속에서 굉장한 소음이 들렸다고 한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 소리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그는 꽤나 심한 신경증에 시달리게 됐다. 그 소리는 교묘한 울림이었으며, 깊고 진한 무엇이었다. 그것의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부터 그는 그것이 (인지조차 하지 못한) 어떤 사소한 잘못으로 인해 걸린 일종의 저주이며, 영원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신과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그 소리를 듣기 시작할 때쯤이었을 것이다. 그 내부의 소리는 외부의 소리를 점점 침식하더니, 그는 곧 바깥으로부터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남들은 그것을 귀머거리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면 여전히 어떤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깊고 넓은 고요의 한 복판에서 풍부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조차 한 귀머거리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점도 함께 언급해야만 하겠다. 거듭 확실한 것은, 병이 가라앉았을 때, 그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질병앓이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말았다. 귀머거리가 되면서 인간사회와의 접촉이 제한돼버리자, 환상적인 것에 대한 그의 경향이 짙어졌고, 극적이고 몽상적인 것에 대한 집념도 더욱 강해졌다. 병으로 인해 산란해진 그의 상상과 망상이 점점 그를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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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의 온기는 졸음을 부른다. 분명히 무언가를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눈꺼풀이 희미하게 덮이고 있을 찰나, 바닥에 세워 놓은 물감통 뒤에서 거뭇한 형상이 빠르게 지나갔다. 분명히 그것은 쥐다. 검은 쥐! 그는 평소에 쥐를 특별히 혐오하고 있었는데 그 감정은, 격렬한 분노의 감정과도 더욱 가까웠다. 작고 미약하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것에 대한 그 어떤, 무척이나 신경질적인 감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감을 양 손으로 쓸어버렸다. 놀란 검은 쥐는 (물론 그는 듣지 못했겠지만) 찍찍 소리를 내며 테이블 밑으로 뛰었으며 이내 사라졌다. 안달이 난 그는 양초에 불을 붙인 후 몽둥이로 쓸 빗자루 들고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그의 검고 붉은 눈은 그 작고 검은 쥐의 형상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포착하려 했으나, 검은 그림자는 용의주도하게 그 시선으로부터 미끄러져 갔다.

검은 쥐는 여전히 찍찍 소리를 내며 작업실 안을 종횡무진 뛰어 다녔다. 순간 그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는데, 그 검은 쥐가 물컹하고 진득한 무엇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검은 쥐가 뛸 때마다 기름 같은 철벅철벅한 무언가가 흘러 내렸고, 그럴수록 작업실의 물감은 하나 둘씩 검게 변해갔다. 나는 조급해졌다. 그 칠흑 같은 검은 색 위에 그 어떤 색이 군림할 수 있으랴! 그는 조심히 붓을 들고 기회를 노렸다. 그 검은 쥐는 바닥에 흘러내리는 물감을 탐욕스럽게 핥아 먹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검은 쥐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것을 향해 붓을 냅다 푹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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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거대한 불을 보고 있었다. 그 불길이 어찌나 맹렬하던지, 순식간에 집 몇 채가 무너졌고, 온 천지가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문득 그는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거대한 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그것을 그리고 싶어졌다. 거대한 불은 거대한 연기다. 거대한 연기는 거대한 어둠이다. 사람들이 연기와 화염 속에서 기절한 남자와 여자를 구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뭉개졌다. 어둠이 그들의 눈알과, 머리통과, 팔과, 다리를, 파먹어 들어갔다. 그는 어둠을, 그 집합적인 형태를, 그 검은색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재난을 피하고자 허둥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화면의 전경 한 쪽 구석에 있고, 그리고 커다란 불길이 반사된 것과 같은 색채를 띤 검은 구름이 그것을 감싸고 있다. 배경을 나타내는 어떤 구체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도망치려 하거나 생존자를 구하려고 하는 무리진 사람들 위로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빛, 즉 형태 없는 연기에 싸인 강렬한 빛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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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바닥에 앉아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양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식사는커녕, 심지어 화장실도 가지 않고 수 시간 동안 그러고 있는 것이 일이었다. (종종 호사가들이 호들갑을 떨기를, 그 모습이 마치 살덩이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옆에는 이젤 위에 올려진 텅 빈 캔버스가 그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사실, 텅 빈 캔버스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한 때 명망 있는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텅 빈 캔버스 앞에서 참을 수 없이 미약하고 하등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그 캔버스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텅 빈 캔버스. 그 캔버스는 원래 앨버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10여 년 전에 마련한 것이었다.

앨버는 명망 있는 공작부인으로, 타고난 미모와 개성 때문에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았으며, 심지어 여왕으로부터도 시샘을 받던 여자였다. 그와 앨버가 밀월 관계였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앨버 부인은 예술 밖에 알지 못했던 고귀한 아카데미의 수장을 존경심과 애정으로 대했다. 앨버 부인은 그의 예술을 사랑했고, 모델 역할을 기꺼이 청하기도 했다. 그와 그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앨버 부인은 공작의 아내였다.

하지만 아깝게도 그녀는 아름다움을 채 꽃피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지독한 열병에 걸려서 수일 만에 유명했다는 사인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지만, 그 외에도 잡스럽고 불쾌한 소문과 의혹들 또한 많이 존재한다는 점도 함께 언급되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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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캔버스를 천천히 응시하고자 했다. 원래 10년 전에 그려졌어야만 하는 텅 빈 캔버스였다. 몸이 파르르 떨려왔고, 어쩐지 슬픈 감정이 들었다. 그 텅 빈 캔버스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 텅 빈 캔버스는 문득, 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칠흑보다 검은 쥐 말이다. 그는 마치 찢어발기려는 듯한 기세로, 고양이 마냥 손톱을 세워 캔버스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는 어둠과 한 덩어리로 뒤엉키게 되었는데, 남들이 봤다면 그가 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을 테다. 그와 상관 없이 어둠은 점점 짙어져갔다. 그는 어둠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상냥하게 말을 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손은 어둠을 만지려고 했다. 그는 어둠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곰과 부엉이와 개와 말이 그의 주변을 빙빙 날며 이 광경을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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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붓을 들고 있었다. 검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두껍고도 큰 붓이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초점 없는 눈으로 닥치는 대로, 손에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빠른 속도로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능숙한 나머지 그의 손이 붓이나 몽둥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의 붓은 점점 닳아갔다. 그의 손은 점점 닳아갔다. 그의 몸은 점점 닳아갔다. 텅 빈 캔버스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점점 소진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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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시골 마을의 음습한 작은 별장은 대단히 심각한 화재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화재를 말할 것 같으면, 사흘 동안 불이 타올랐고, 사흘 동안 내린 비에 의해 가까스로 꺼졌으며,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그 열기 때문에 사흘 동안 옷을 벗고 살았다느니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소문에 의하면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 검은 페인팅이 하나 발견됐는데, 인근 마을의 농부가 땔감이나 하려고 가져다 놓은 것을 고귀하신 어떤 분께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사갔다고 전해진다. (14.1.14)

* 배윤환 <기름 붙일 곳을 찾는 사나이> 서문으로 쓰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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